मध्यमकप्रवेशः
가운데 길로 들어가며 — 중관학 입문

연기가 곧 공이다

제3편

『중론』 제24품 관사제품. “모든 것이 공하다면 불교가 무너진다”는 반론과, 그것을 거꾸로 돌려주는 나가르주나의 응답, 그리고 사중 등식.

१

Upodghāta

가장 많이 인용된 게송

나가르주나가 남긴 약 450수의 게송 가운데 단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동아시아와 티베트의 주석가들 대부분은 주저 없이 『중론』 제24품 제18게를 꼽을 것이다. 중국 천태종의 지의(智顗)는 이 게송에서 공(空)·가(假)·중(中)의 세 진리를 읽어 내어 자기 교학의 뼈대로 삼았고, 동아시아에서는 이 게송을 아예 ‘삼제게(三諦偈)’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인도의 월칭과 티베트의 쫑카파 역시 이 게송을 중관 사상의 요체로 거듭 인용했다. 제1편 끝에서 우리는 이 게송을 미리 만나 보았고, 연기와 공과 가명과 중도가 ‘하나의 사태, 네 개의 이름’이라는 도식도 그려 보았다. 이번 편에서는 그 도식이 어떻게 해서 성립하는지를 차근차근 따져 볼 차례다.

그런데 이 유명한 게송은 허공에 홀로 떠 있는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제24품이라는 긴 논쟁의 한가운데, 그것도 논쟁의 흐름이 완전히 뒤집히는 지점에 놓여 있다. 게송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그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야 한다. 제24품의 제목은 「관사제품(觀四諦品)」, 곧 ‘사성제에 대한 고찰’이다. 괴로움과 그 원인, 괴로움의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나가르주나는 바로 이 가르침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공이 불교를 파괴하는 사상이라는 의혹에 정면으로 답한다.

이 품의 구성은 인도 논쟁 문헌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른다. 먼저 상대의 입장을 최대한 강하게 제시하고, 이어서 그에 대한 반박을 펼치는 방식이다. 앞의 것을 전론(前論, pūrvapakṣa), 뒤의 것을 후론(後論, uttarapakṣa)이라 한다. 제24품에서는 처음 여섯 게송이 전론, 나머지 서른네 게송이 후론이다. 이번 편은 이 구성을 그대로 따라가며, 논적의 목소리를 먼저 충분히 듣고 나서 나가르주나의 응답을 들어 볼 것이다.

1–6게 논적의 반론: 공하다면 사성제와 삼보가 무너진다 7–17게 공의 목적·의미를 모른다는 지적, 이제설, 첫 번째 역전 18–19게 사중 등식: 연기 = 공 = 가명 = 중도 20–39게 사성제·사과·삼보·업을 하나씩 들어 반론을 되돌려줌 40게 결론: 연기를 보는 자는 사성제를 본다
그림 1 제24품 40게의 구성. 막대의 길이는 게송 수에 비례한다. 유명한 24.18은 논쟁의 흐름이 방어에서 반격으로 넘어가는 경첩에 놓여 있다.
२

Pūrvapakṣa

논적의 반론: 무너지는 삼보

제24품은 논적의 날카로운 반론으로 시작한다. 이 논적은 불교 바깥의 사람이 아니다. 사성제를 믿고 사과(四果)를 추구하며 삼보에 귀의한 불교도, 아마도 제2편에서 만난 아비달마 논사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반론은 더 뼈아프다. 그는 공의 가르침이 불교 자체를 무너뜨린다고 말한다.

『중론』 24.1 यदि शून्यमिदं सर्वमुदयो नास्ति न व्ययः ।
चतुर्णामार्यसत्यानामभावस्ते प्रसज्यते ॥
yadi śūnyam idaṃ sarvam udayo nāsti na vyayaḥ |
caturṇām āryasatyānām abhāvas te prasajyate ||
若一切皆空 無生亦無滅
如是則無有 四聖諦之法
만약 이 모든 것이 공하다면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다.
그렇다면 그대에게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없다는 귀결이 따른다.

논적의 추론은 첫 걸음부터 명료하다. 공하다는 것이 ‘없다’는 뜻이라면, 없는 것은 생겨날 수도 사라질 수도 없다. 그런데 사성제는 괴로움이 생겨나는 원인과 괴로움이 사라지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다. 생겨남과 사라짐이 없다면 사성제는 설 자리가 없다. 여기서 한 낱말에 주목하자. 게송 끝의 prasajyate, 곧 ‘~라는 귀결이 따른다’는 동사다. 이 동사의 명사형이 바로 prasaṅga, 제4편에서 자세히 볼 ‘귀류(歸謬)’다. 흥미롭게도 제24품에서 이 무기를 먼저 꺼내 드는 쪽은 나가르주나가 아니라 논적이다. 논적은 나가르주나의 방법을 빌려 나가르주나를 공격하는 셈이다.

그다음 다섯 게송에서 논적은 이 귀결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한 조각이 넘어지면 다음 조각이 넘어지는 도미노처럼, 불교의 모든 것이 차례로 무너져 내린다.

논적이 그리는 붕괴의 사슬: 공에서 시작하여 삼보의 파괴와 세간의 관습 부정까지 모든 것이공하다면 생겨남도사라짐도 없다 사성제가없다 앎·끊음·증득·닦음이없다 네 가지 과위와향하는 이가 없다 승가가없다 법이없다 붓다가없다 삼보의 파괴, 그리고업과 과보, 세간의 관습까지 24.124.224.324.424.524.6
그림 2 논적이 그리는 붕괴의 사슬(24.1–6). 공에서 시작한 귀결이 사성제, 수행, 승가, 법, 붓다를 차례로 넘어뜨린다.

사슬의 각 고리를 하나씩 풀어 보자. 사성제가 없다면 괴로움을 두루 아는 것, 그 원인을 끊는 것, 소멸을 증득하는 것, 길을 닦는 것이라는 네 가지 수행이 모두 불가능하다(24.2). 수행이 불가능하다면 흐름에 든 이(예류), 한 번 돌아오는 이(일래), 돌아오지 않는 이(불환), 아라한이라는 네 가지 과위와 그 과위를 향해 가는 네 부류의 수행자도 있을 수 없다(24.3). 이 여덟 부류의 성자가 없으면 승가가 없고(24.4), 사성제가 없으면 법이 없으며, 법과 승가가 없는데 어떻게 붓다가 있겠는가(24.5). 결국 공을 말하는 자는 삼보를 부정하고, 선업과 악업의 과보를 부정하며, 세간에서 통용되는 모든 관습적 언어와 행위까지 부정한다는 것이다(24.6).

이 반론은 결코 허수아비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공을 처음 접하는 많은 사람이 품는 의혹을 가장 철저하게 정식화한 것이며, 제1편에서 본 ‘허무론’과 ‘도덕 무용론’의 오해가 불교도의 언어로 표현된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반론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만약 ‘공하다’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다’를 뜻한다면, 논적의 결론은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가르주나가 이 반론에 답하는 길은 하나뿐이다. 논리의 사슬을 끊는 것이 아니라, 사슬의 첫 고리에 놓인 전제, 곧 ‘공하다면 생겨남도 사라짐도 없다’는 전제를 문제 삼는 것이다.

३

Uttarapakṣa

그대는 공의 목적을 모른다

나가르주나의 응답은 반론의 내용이 아니라 반론을 제기한 사람의 이해를 겨누는 데서 시작한다. 그는 논적이 공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한다고 말한다.

『중론』 24.7 अत्र ब्रूमः शून्यतायां न त्वं वेत्सि प्रयोजनम् ।
शून्यतां शून्यतार्थं च तत एवं विहन्यसे ॥
atra brūmaḥ śūnyatāyāṃ na tvaṃ vetsi prayojanam |
śūnyatāṃ śūnyatārthaṃ ca tata evaṃ vihanyase ||
汝今實不能 知空空因緣
及知於空義 是故自生惱
이에 대해 우리는 말한다. 그대는 공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공성 그 자체와 공의 의미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대는 이렇게 스스로를 해치는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논적이 모르는 것을 세 가지로 꼽는다. 이 세 가지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주석가마다 조금씩 다르게 풀이하지만, 월칭의 해석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논적이 모르는 것뜻논적의 오해와의 관계
공의 목적
prayojana
공이 설해진 까닭. 공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자성에 대한 집착과 희론을 가라앉히기 위해 설해졌다.공을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주장으로 착각한다.
공성 그 자체
śūnyatā
공성이 무엇인가. 공성은 희론이 적멸한 자리이며, 그 자체로 붙잡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공을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하나의 상태로 대상화한다.
공의 의미
śūnyatārtha
‘공’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내용. 월칭에 따르면 그것은 연기, 곧 조건에 의존하여 일어남이다.‘공’을 ‘비존재’의 동의어로 읽는다.

세 번째 항목이 이번 편의 핵심이다. 논적의 모든 반론은 ‘공하다 =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등식 위에 서 있다. 나가르주나는 이 등식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공하다 = 연기한다’라는 등식을 놓는다. 이 교체가 이루어지는 순간 논적의 도미노는 첫 조각부터 서지 못한다. 연기하는 것은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조건에 따라 사라지므로, ‘공하다면 생겨남도 사라짐도 없다’는 논적의 첫 전제가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두 개의 진리

이어서 나가르주나는 붓다의 가르침이 두 가지 진리에 의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세간의 관습적 진리(세속제)와 궁극적 의미의 진리(승의제)다(24.8). 이 두 진리의 구별을 모르는 자는 붓다의 깊은 가르침을 알지 못한다(24.9). 그리고 두 진리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한다.

『중론』 24.10 व्यवहारमनाश्रित्य परमार्थो न देश्यते ।
परमार्थमनागम्य निर्वाणं नाधिगम्यते ॥
vyavahāram anāśritya paramārtho na deśyate |
paramārtham anāgamya nirvāṇaṃ nādhigamyate ||
若不依俗諦 不得第一義
不得第一義 則不得涅槃
관습적 언어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궁극의 진리를 가르칠 수 없고,
궁극의 진리에 이르지 않고서는 열반을 얻을 수 없다.

이 게송은 논적의 여섯 번째 반론, 곧 공을 말하는 자는 세간의 모든 관습을 부정한다는 비판에 대한 직접적인 답이기도 하다. 나가르주나는 세간의 관습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궁극의 진리조차 관습적 언어를 통해서만 전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사성제’, ‘괴로움’, ‘길’, ‘붓다’라는 말들은 모두 관습적 언어이지만, 그 언어가 없으면 누구도 해탈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 공은 이 언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언어가 자성을 가진 실체를 가리킨다는 착각을 걷어 낼 뿐이다. 두 진리의 관계는 제8편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그다음 나가르주나는 제1편에서 본 뱀의 비유(24.11)로 잘못 붙잡은 공의 위험을 경고한 뒤, 논적에게 인상적인 비유 하나를 던진다.

『중론』 24.15 स त्वं दोषानात्मनीयानस्मासु परिपातयन् ।
अश्वमेवाभिरूढः सन्नश्वमेवासि विस्मृतः ॥
sa tvaṃ doṣān ātmanīyān asmāsu paripātayan |
aśvam evābhirūḍhaḥ sann aśvam evāsi vismṛtaḥ ||
汝今自有過 而以迴向我
如人乘馬者 自忘於所乘
그대는 그대 자신의 허물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우고 있다.
말 위에 올라탄 채 바로 그 말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말에 올라타 달리면서 “내 말이 어디 갔지?” 하고 두리번거리는 사람을 상상해 보라. 그가 찾는 말은 바로 그가 깔고 앉아 있는 것이다. 논적은 공의 가르침에서 허물을 찾아 헤매지만, 그 허물은 사실 논적 자신이 올라타고 있는 자성론에 있다. 이것이 제24품 후반부 전체를 이끄는 역전의 예고다.

४

Viparyaya

역전: 자성이야말로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제1편에서 우리는 24.14를 만났다. “공이 성립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성립하고, 공이 성립하지 않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 이제 이 게송이 제24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분명히 볼 수 있다. 논적은 ‘공하다면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나가르주나는 이를 정확히 뒤집어 ‘자성이 있다면 모든 것이 불가능하고, 공하기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응수한다. 같은 사슬을 반대 방향으로 당기는 것이다.

논적의 구도와 나가르주나의 구도를 대칭으로 비교한 도식 논적의 구도 나가르주나의 구도 공 = 존재하지 않음 생멸이 없다 공하면 모든 것이 불가능 자성 = 불변·독립 공 = 연기 생멸이 없다 생멸이 있다 자성이 있으면모든 것이 불가능 공하기에모든 것이 가능
그림 3 두 구도의 대칭. 논적과 나가르주나는 ‘생멸이 없으면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중간 고리를 공유한다. 갈라지는 곳은 맨 윗줄, 곧 ‘공’과 ‘자성’이 각각 무엇을 뜻하는가이다.

이 도식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나가르주나가 논적의 추론 형식을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겨남과 사라짐이 없다면 사성제도, 수행도, 삼보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중간 고리는 두 사람이 함께 받아들인다. 다툼은 오직 그 고리에 무엇을 넣느냐에 있다. 논적은 ‘공’을 넣었고, 나가르주나는 ‘자성’을 넣는다. 제2편에서 본 자성의 정의, 곧 ‘만들어지지 않고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음’을 떠올리면 그 까닭이 분명해진다. 자성을 지닌 것은 조건 없이 이미 그러하므로 새로 생겨날 수 없고, 조건이 사라져도 여전히 그러하므로 사라질 수도 없다. 생멸이 없는 것은 공한 것이 아니라 자성을 지닌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24.20 이하에서 이 논리를 사성제 하나하나에 적용한다. 논적이 사성제를 지키려고 자성을 붙들수록, 그 자성이 사성제를 하나씩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사성제에 대한 역전 논증 (24.20–25의 요지)
진리자성이 있다고 가정하면공하기에 가능한 것
고(苦)붓다는 무상한 것이 괴로움이라고 설했다. 자성을 지닌 것은 변하지 않으므로 무상하지 않고, 따라서 괴로움일 수도 없다.조건 따라 변하는 것이기에 괴로움이 있다.
집(集)괴로움이 자성으로 존재한다면 이미 그러한 것이므로 원인에서 새로 일어날 수 없다.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진리가 설 자리를 잃는다.갈애를 조건으로 괴로움이 일어난다.
멸(滅)자성으로 존재하는 괴로움은 조건이 사라져도 여전히 그러하므로 결코 소멸할 수 없다.조건이 사라지면 괴로움도 사라진다.
도(道)길이 자성을 지녔다면 이미 완성되어 있으므로 ‘닦는다’는 일이 성립하지 않는다. 닦음이란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조건을 쌓아 가는 수행으로 길이 닦인다.

논리는 사성제에서 멈추지 않는다. 자성으로 깨닫지 못한 존재라면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깨달을 수 없고, 자성으로 붓다가 아닌 자는 보리를 향해 보살행을 닦아도 붓다가 될 수 없다. 자성으로 선하거나 악한 업이 있다면 그것은 조건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과보와 연결될 수 없다. 이렇게 나가르주나는 논적이 제기한 붕괴의 사슬을 고리 하나 빠짐없이 되짚어 가며, 그 모든 붕괴의 원인이 공이 아니라 자성임을 보인다. 그리고 논적의 여섯 번째 반론을 그대로 되돌려준다. 연기이자 공인 것을 부정하는 그대야말로 세간의 모든 관습을 부정하고 있다(24.36).

생각해 보기

‘나는 원래 게으른 사람이다’, ‘그 사람은 본래 그런 성격이다’ 같은 말을 떠올려 보자. 이런 말들은 게으름이나 성격에 일종의 자성을 부여한다. 그런데 게으름이 정말로 나의 자성이라면, 나는 결코 부지런해질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게으름이 조건에 따라 생겨난 것이라면, 조건을 바꾸어 부지런해질 길이 열린다. 자성을 부정하는 것이 오히려 변화의 가능성을 여는 이 구조는, 24품의 역전 논증과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가?

५

Padaccheda

24.18을 한 낱말씩

이제 논쟁의 경첩에 놓인 그 게송을 읽을 준비가 되었다. 나가르주나는 앞에서 논적이 ‘공의 의미’를 모른다고 지적했다. 24.18은 바로 그 의미를 제시하는 게송이다. 먼저 전체를 다시 보자.

『중론』 24.18 यः प्रतीत्यसमुत्पादः शून्यतां तां प्रचक्ष्महे ।
सा प्रज्ञप्तिरुपादाय प्रतिपत्सैव मध्यमा ॥
yaḥ pratītyasamutpādaḥ śūnyatāṃ tāṃ pracakṣmahe |
sā prajñaptir upādāya pratipat saiva madhyamā ||
眾因緣生法 我說即是空
亦為是假名 亦是中道義
연기인 것, 그것을 우리는 공성이라 부른다.
그것은 의존하여 시설된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가운데 길이다.

산스크리트 게송은 짧지만 문법적으로 정교하게 짜여 있다. 게송을 낱말 단위로 끊어 읽는 것을 인도 주석 전통에서는 ‘빠다체다(padaccheda)’, 곧 낱말 나누기라고 한다. 우리도 그렇게 해 보자.

낱말문법뜻과 역할
yaḥ관계대명사, 남성 단수 주격‘~인 것’. 뒤의 pratītyasamutpādaḥ(남성)와 성이 일치한다.
pratītyasamutpādaḥ남성 명사, 단수 주격연기. pratītya(의존하여) + samutpāda(함께 일어남). 사물이 아니라 ‘일어남’이라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śūnyatāṃ여성 명사, 단수 대격공성을. ‘부르다’의 목적 보어로, 연기를 무엇이라 부르는지를 나타낸다.
tāṃ지시대명사, 여성 단수 대격‘그것을’. 앞의 yaḥ에 호응하는 상관사이지만, 형태는 바로 옆의 śūnyatāṃ에 맞추어 여성형이 되었다.
pracakṣmahe동사, 1인칭 복수 현재‘우리는 부른다, 선언한다’. 나가르주나가 속한 전통 전체의 목소리로 말하는 표현이다.
sā지시대명사, 여성 단수 주격‘그것은’. 후반의 주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두고 해석이 갈린다(아래 참조).
prajñaptiḥ여성 명사, 단수 주격시설, 가명, 의존적 명칭. pra-√jñā(알게 하다)의 사역형에서 나온 말로, ‘알려지도록 세운 것’이다.
upādāya절대분사(동명사)‘~을 취하여, ~에 의존하여’. 무엇에 의존하는지는 생략되어 있다. 수레가 부품에 의존하듯.
pratipat여성 명사, 단수 주격길, 나아감. 수행의 길이라는 실천적 함의를 지닌다.
sā eva (saiva)지시대명사 + 강조 불변사‘바로 그것이’. eva가 동일성을 강조한다.
madhyamā형용사, 여성 단수 주격‘가운데의’. pratipat를 꾸민다. 중관(Madhyamaka)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온다.
24.18의 대명사 호응 관계 도식. sā가 가리키는 대상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음을 보인다 yaḥ pratītyasamutpādaḥ śūnyatāṃ tāṃ pracakṣmahe sā prajñaptir upādāya… 남성 여성 여성 술어도 여성 상관 구문: yaḥ … tāṃ (‘~인 것, 그것을’) 독법 ① sā = 공성 (성의 일치) 독법 ② sā = 연기이자 공성인 사태 (술어의 성에 끌림)
그림 4 24.18의 대명사 호응. 전반의 상관 구문은 분명하지만, 후반의 주어 sā가 가리키는 대상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열려 있다.

낱말 나누기에서 두 가지를 눈여겨보자. 첫째는 sā의 문제다. sā는 여성형 대명사다. 앞 문장에서 여성 명사는 śūnyatā뿐이므로, 문법적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선행사는 공성이다. 그렇게 읽으면 후반은 “공성은 의존하여 시설된 것이다”가 된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에서는 지시대명사가 뒤따르는 술어 명사의 성에 끌려 형태를 맞추는 일이 드물지 않은데, 후반의 술어 prajñapti와 pratipat는 모두 여성 명사다. 그렇다면 sā는 앞 문장 전체가 말한 것, 곧 ‘연기이자 공성인 그것’을 받는다고 읽을 여지도 생긴다. 이 작은 문법적 갈림길이 해석의 큰 갈림길로 이어진다는 것을 제8절에서 볼 것이다.

둘째는 구마라집 번역의 특징이다. 산스크리트 원문의 주어는 pratītyasamutpāda, 곧 ‘연기’라는 과정인데, 구마라집은 이를 ‘衆因緣生法’, 곧 ‘여러 인연으로 생겨난 법들’로 옮겼다.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 그 과정의 산물인 사물들을 가리키는 말로 바뀐 것이다. 빠알리어로 말하면 paṭiccasamuppāda(연기)가 paṭiccasamuppanna(연기한 것들)로 바뀐 셈이다. 이 번역은 단순한 오역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이다. 한역 게송에서 공·가·중은 모두 ‘인연으로 생겨난 법들’의 세 가지 면모가 되고, 이것이 뒤에서 볼 천태의 삼제설로 이어진다.

६

Samīkaraṇa

왜 연기가 곧 공인가

24.18의 전반은 선언처럼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우리가 지난 두 편에 걸쳐 준비해 온 간결한 논증이 있다. 전제들을 나란히 놓아 보자.

전제 1연기하는 것은 다른 것, 곧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일어난다. (연기의 정의)
전제 2자성을 지닌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중론』 15.2)
중간 결론그러므로 연기하는 것은 자성을 지닐 수 없다. (전제 1과 2의 충돌)
전제 3공하다는 것은 자성이 비어 있다는 것이다. (공의 정의, 제1편)
결론그러므로 연기하는 것은 공하다.

이 논증은 연기하는 것이 공하다는 한 방향만 보여 준다. 그런데 24.18은 둘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반대 방향, 곧 공한 것이 연기하는 것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장되는가? 바로 다음 게송이 이 틈을 메운다.

『중론』 24.19 अप्रतीत्य समुत्पन्नो धर्मः कश्चिन्न विद्यते ।
यस्मात्तस्मादशून्यो हि धर्मः कश्चिन्न विद्यते ॥
apratītya samutpanno dharmaḥ kaścin na vidyate |
yasmāt tasmād aśūnyo hi dharmaḥ kaścin na vidyate ||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의존하지 않고 생겨난 법은 어떤 것도 없기 때문에,
공하지 않은 법 또한 어떤 것도 없다.

24.19는 모든 법이 연기한 것이라는 불교의 공통 전제를 끌어와, 공하지 않은 법이 하나도 없다는 결론을 낸다. 이로써 ‘연기한 것’의 범위와 ‘공한 것’의 범위가 정확히 겹친다. 연기하면서 공하지 않은 것도 없고, 공하면서 연기하지 않은 것도 없다. 두 원이 완전히 포개진다. 그렇다면 연기와 공은 같은 대상들에 대해 서로 다른 측면을 말하는 두 이름이 된다. ‘연기’는 그것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공’은 그것들에게 무엇이 없는지를 말한다. 같은 달을 두고 한 사람은 ‘햇빛을 받아 빛나는 것’이라 부르고 다른 사람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 것’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짚어 두기: 공과 무위법

제2편에서 보았듯 아비달마는 조건을 떠난 무위법, 특히 열반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의존하지 않고 생겨난 법은 없다”는 24.19는 열반을 어떻게 다루는가? 월칭은 무위법 역시 유위법에 의존하여 시설된 것, 예컨대 열반은 번뇌의 소멸이라는 방식으로만 말해지는 것이라고 본다. 열반조차 자성을 지닌 실체가 아니라는 이 주장은 제9편에서 제25품 관열반품과 함께 깊이 다룬다.

७

Madhyamā pratipad

가운데 길의 두 방향

24.18의 후반은 연기이자 공인 것을 다시 두 이름으로 부른다. ‘의존하여 시설된 것(prajñaptir upādāya)’과 ‘가운데 길(pratipat madhyamā)’이다. 왜 이 두 이름이 덧붙어야 했을까. 공과 연기만으로는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공이라는 말은 부정의 말이다. 자성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공만 말하면 듣는 이는 쉽게 논적처럼 ‘아무것도 없다’는 극단으로 미끄러진다. 여기에 ‘의존하여 시설된 것’이라는 말이 균형추로 덧붙는다. 자성은 없지만, 사물은 조건들에 의존하여 이름 붙여지고 작용하는 방식으로는 분명히 성립한다. 수레는 자성이 없지만 부품에 의존하여 ‘수레’로 시설되고, 그렇게 시설된 수레는 짐을 싣고 달린다. 공이 ‘있다’는 극단을 막는다면, 가명은 ‘없다’는 극단을 막는다. 그리고 두 극단을 동시에 떠나는 것, 그것이 가운데 길이다.

가운데 길의 두 방향: 공은 상견을, 가명은 단견을 막는다 있다 · 상견 자성을 지니고영원히 존재한다 없다 · 단견 아무것도 없고끊어져 사라진다 가운데 길 pratipat madhyamā 공 śūnyatā 자성이 없으므로 ‘있다’를 떠난다 가명 prajñapti 의존하여 성립하므로 ‘없다’를 떠난다 연기 pratītyasamutpāda — 두 방향을 한꺼번에 담은 이름 의존하여(→ 자성 없음) 일어남(→ 없음이 아님)
그림 5 가운데 길의 두 방향. ‘연기’라는 한 낱말 안에 이미 두 방향이 들어 있다. ‘의존하여’는 자성을 부정하고, ‘일어남’은 허무를 부정한다.

그림의 맨 아래 줄을 주목하자. 사실 ‘연기’라는 낱말 하나에 이미 두 방향이 모두 들어 있다. pratītya, 곧 ‘의존하여’라는 부분은 독립적 자성을 부정하고, samutpāda, 곧 ‘일어남’이라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를 부정한다. 24.18이 연기를 공과 가명과 중도로 풀어 쓴 것은, 연기라는 한 낱말 속에 접혀 있던 이 두 방향을 펼쳐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제1편에서 본 『깟짜나곳따 경』이 ‘있다’와 ‘없다’의 두 극단을 물리치고 그 자리에 연기를 놓았던 것과 정확히 같은 구조다. 나가르주나는 초기경전의 중도를 논리적으로 해부하여 그 내부 구조를 드러낸 것이다.

८

Vyākhyā-bheda

갈라지는 독법들

짧은 게송일수록 해석은 길어진다. 24.18은 그 대표적인 예다. 앞에서 본 두 가지 문법적 갈림길, 곧 sā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주어가 ‘연기’라는 과정인가 ‘연기한 법들’인가 하는 물음은 서로 다른 해석 전통을 낳았다.

월칭: 공성 또한 시설이다

인도 중관의 대표적 주석가 월칭은 『명구론(Prasannapadā)』에서 이 게송을 풀이하며, 후반의 주어를 공성으로 읽는 쪽에 가깝게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자성이 공하다는 그 공성 자체가 의존하여 시설된 것이다. 수레가 부품에 의존하여 ‘수레’라고 불리듯, 공성도 연기하는 사물들에 의존해서만 말해질 뿐, 사물들과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다. 이 독법은 제1편에서 본 ‘공을 견해로 삼는 자는 구제할 수 없다’(13.8)는 경고와 긴밀히 이어진다. 공성마저 시설일 뿐이라면, 공을 새로운 실체로 붙잡을 여지가 원천적으로 사라진다. 이른바 ‘공의 공(śūnyatā-śūnyatā)’이다.

천태 지의: 공·가·중의 세 진리

중국 천태종의 지의는 구마라집의 한역을 바탕으로 이 게송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한역에서 주어는 ‘인연으로 생겨난 법들’이고, 그 법들이 ‘곧 공(即是空)’이며 ‘또한 가명(亦為是假名)’이고 ‘또한 중도(亦是中道義)’라고 되어 있다. 지의는 이 세 술어를 하나의 법이 동시에 지니는 세 가지 진리로 보았다. 모든 법은 자성이 없다는 점에서 공제(空諦)이고, 인연 따라 임시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가제(假諦)이며, 공과 가가 둘이 아니라는 점에서 중제(中諦)다. 이 셋은 차례로 거쳐 가는 단계가 아니라 한 법 안에 동시에 원만히 융합되어 있다는 것이 천태의 ‘삼제원융(三諦圓融)’이며, 이를 한 마음에서 동시에 관하는 것이 ‘일심삼관(一心三觀)’이다. 원문과는 거리가 있는 창조적 해석이지만, 동아시아 불교사상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해석이기도 하다.

24.18을 읽는 주요 독법
독법주어 이해핵심 강조이어지는 사상
산스크리트 원문의 직역연기라는 과정연기와 공성의 동일성, 그리고 그 둘이 곧 가운데 길임『깟짜나곳따 경』의 중도
월칭후반의 주어를 공성으로공성 자체도 의존적 시설이므로 실체화할 수 없다공의 공, 귀류 중관
구마라집 한역인연으로 생겨난 법들연기한 사물들이 공이며 가명이며 중도동아시아 삼론학
천태 지의한역을 따라 법들한 법에 공·가·중의 세 진리가 원융함삼제원융, 일심삼관

이 가운데 어느 하나만이 옳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원문의 문법이 허용하는 범위, 각 주석가가 서 있던 논쟁의 맥락, 그리고 그 해석이 수행과 사유에 열어 준 가능성을 함께 저울질해야 한다. 다만 입문자에게 권하고 싶은 원칙이 하나 있다. 어떤 해석을 따르든, 공이 ‘연기하는 사물들과 떨어져 따로 있는 무엇’으로 읽히는 순간 그 해석은 나가르주나의 의도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네 독법은 모두 이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번 편의 연습문제 5번은 두 독법의 차이를 정밀하게 따져 보는 문제다.

९

Pratītya-darśana

연기를 보는 자

제24품은 다음 게송으로 끝난다. 논적의 반론으로 시작한 품이, 논적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사성제를 오히려 공의 이해를 통해 되찾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중론』 24.40 यः प्रतीत्यसमुत्पादं पश्यतीदं स पश्यति ।
दुःखं समुदयं चैव निरोधं मार्गमेव च ॥
yaḥ pratītyasamutpādaṃ paśyatīdaṃ sa paśyati |
duḥkhaṃ samudayaṃ caiva nirodhaṃ mārgam eva ca ||
是故經中說 若見因緣法
則為能見佛 見苦集滅道
연기를 보는 자는 바로 이것을 본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일어남과 괴로움의 소멸과 길을.

이 게송은 초기경전의 유명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맛지마 니까야』의 「코끼리 발자국 비유 큰 경(Mahāhatthipadopama-sutta, MN 28)」에서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의 말씀을 이렇게 전한다.

『맛지마 니까야』 28 Y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yo dhammaṃ passati s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i.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구마라집이 24.40을 옮기면서 원문에 없는 ‘경전에서 말하기를(經中說)’과 ‘곧 붓다를 본다(則為能見佛)’를 덧붙인 것도 이런 경전 구절들을 의식한 결과로 보인다. 어느 쪽이든 메시지는 분명하다. 연기를 올바로 보는 것은 사성제를 보는 것이고, 법을 보는 것이며, 나아가 붓다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24.18에 따르면 연기를 보는 것은 곧 공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을 보는 것은 사성제를 파괴하는 일이 아니라 사성제를 비로소 제대로 보는 일이 된다. 논적의 도미노가 공에서 시작해 삼보의 붕괴로 끝났다면, 나가르주나의 사슬은 공에서 시작해 사성제의 온전한 봄으로 끝난다.

이번 편에서 우리는 중관학의 중심 명제가 어떤 논쟁의 압력 속에서 태어났는지를 보았다. 연기가 곧 공이라는 명제는 신비한 직관의 고백이 아니라, 불교의 근본 가르침을 지키려는 논적의 진지한 반론에 맞서 그 반론이 딛고 선 전제를 정밀하게 해부한 결과였다. 그런데 이 해부 과정에서 나가르주나가 되풀이해 쓴 방법이 있다. 상대의 전제를 받아들인 채 그 귀결을 끝까지 밀고 나가 모순을 드러내는 것, 제24품 첫 게송에서 논적이 먼저 꺼내 들었던 바로 그 prasaṅga다. 다음 편에서는 이 방법, 그리고 ‘있다, 없다, 둘 다, 둘 다 아니다’의 네 갈래로 이루어진 사구(四句)라는 중관의 또 다른 연장을 손에 익혀 보자.

이 편의 요점

  1. 24.18은 제24품 관사제품의 논쟁 한가운데, 방어에서 반격으로 넘어가는 경첩에 놓여 있다. 품은 전론(1–6게)과 후론(7–40게)으로 이루어진다.
  2. 논적은 ‘공하다 =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생멸, 사성제, 수행, 사과, 승가, 법, 붓다가 차례로 무너진다고 반론한다.
  3. 나가르주나는 논적이 공의 목적·공성·공의 의미를 모른다고 지적하고, ‘공 = 연기’로 등식을 교체한다. 추론의 형식은 그대로 두고 전제만 바꾸어,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공이 아니라 자성임을 보인다.
  4. 연기하는 것은 의존하므로 자성이 없고(24.18), 연기하지 않은 법은 없으므로 공하지 않은 법도 없다(24.19). 연기와 공은 같은 것들의 두 이름이다.
  5. 공은 ‘있다’의 극단을, 가명은 ‘없다’의 극단을 막고, 그 둘을 함께 떠나는 것이 중도다. 24.18의 해석은 월칭의 ‘공의 공’과 천태의 ‘삼제원융’ 등으로 갈라졌다.

용어 정리

우리말산스크리트한역뜻
전론·후론pūrvapakṣa / uttarapakṣa前論·後論논쟁 문헌에서 상대의 주장 / 그에 대한 응답
귀결, 귀류prasaṅga (pra-√sañj)歸謬상대의 전제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가 따라 나옴
공의 목적śūnyatā-prayojana空因緣공이 설해진 까닭, 희론의 적멸
공의 의미śūnyatārtha空義‘공’이 가리키는 내용, 곧 연기
의존적 시설upādāya prajñapti假名무엇에 의존하여 세워진 이름
연기한 것pratītyasamutpanna因緣生法연기라는 과정의 산물인 사물들
삼제—三諦천태의 공제·가제·중제
다음 편 예고

제4편 「논증의 연장통」에서는 중관학의 두 가지 핵심 도구를 다룬다. 어떤 명제에 대해 ‘있다, 없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의 네 가능성을 모두 검토하는 사구분별(catuṣkoṭi), 그리고 상대의 전제에서 모순을 끌어내는 귀류(prasaṅga)다. 인도 논리학의 기본 개념과 함께, 네 갈래를 모두 부정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따져 본다.

१०

Abhyāsa

연습문제

다섯 문제는 쉬운 것부터 어려운 것 순서로 놓여 있다. 선택지를 누르면 바로 채점되며, 채점 후 해설을 펼쳐 볼 수 있다. 마지막 문제는 법학적성시험(LEET) 언어이해 영역의 형식을 따랐다.

맞힌 문제 0 / 5 (푼 문제 0)
1.기초 ★★★★★
『중론』 제24품 첫머리에서 논적이 제기한 반론의 요지로 가장 적절한 것은?
2.기본 ★★★★★
24.15의 “말 위에 올라탄 채 바로 그 말을 잊어버린 사람”이라는 비유가 뜻하는 바로 가장 적절한 것은?
3.중급 ★★★★★
『중론』 24.18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4.심화 ★★★★★
제24품 후반부 나가르주나의 역전 논증을 적용한 추론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5.최고난도 ★★★★★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중론』 24.18의 전반은 “연기인 것, 그것을 우리는 공성이라 부른다”이다. 여기서 관계대명사와 지시대명사의 상관 구문은 연기와 공성을 동일시한다. 문제는 후반 “그것은 의존하여 시설된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가운데 길이다”의 주어인 여성 단수 대명사 sā이다. 연기(pratītyasamutpāda)는 남성 명사이고 공성(śūnyatā)은 여성 명사이므로, 문법적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선행사는 공성이다. 다만 산스크리트에서는 지시대명사가 뒤따르는 술어 명사의 성에 끌려 형태를 바꾸는 일이 드물지 않으며, 후반의 술어인 ‘시설’과 ‘길’은 모두 여성 명사이다. 이 때문에 sā가 앞 문장이 말하는 사태 전체를 받는다고 볼 여지도 있다.

해석 갑은 sā를 공성으로 본다. 그러면 후반은 “공성은 의존하여 시설된 것이다”가 된다. 갑에 따르면 공성은 연기하는 사물들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궁극적 실재가 아니라, 사물들에 의존해서만 말해지는 시설이다. 사물들을 떠난 곳에 따로 공성이 있지 않으므로 공성 역시 자성을 갖지 않는다. 이 독법은 공을 새로운 실체로 삼는 것을 경계하는 전통의 입장과 잘 들어맞는다. 해석 을은 sā를 연기이자 공성인 사태 전체로 보되, 그 사태가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을 연기하는 사물들로 이해한다. 그러면 후반은 “연기하는 사물들은 의존하여 시설된 것이다”가 된다. 을에 따르면 24.18은 공성의 지위를 논하는 게송이 아니라, 연기하는 사물들이 자성을 결여하면서도 관습적 명칭으로서는 성립한다는 점을 밝히는 게송이다. 구마라집이 전반의 주어를 ‘여러 인연으로 생겨난 법들’로 옮긴 것은 을과 가까운 이해를 보여 준다.

두 해석은 가운데 길의 이해에서도 차이를 낳는다. 갑에서 가운데 길은 사물의 자성을 부정하는 공성마저 붙잡지 않는 것, 곧 부정 자체도 실체화하지 않음으로써 극단을 떠나는 방식이다. 을에서 가운데 길은 사물이 자성을 결여한다는 점에서 ‘있다’는 극단을 떠나고, 관습적으로 성립한다는 점에서 ‘없다’는 극단을 떠나는 것이다.

윗글에 대한 추론으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있는 대로 고른 것은?
ㄱ.갑과 을은 sā의 선행사에 대해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리지만, 24.18 전반이 연기와 공성을 동일시한다는 점은 함께 받아들인다.
ㄴ.갑에서 가운데 길이 부정 자체를 실체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해되는 것은, 공성이 연기하는 사물들보다 더 근원적인 실재로서 그 사물들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ㄷ.산스크리트에서 지시대명사가 술어 명사의 성에 끌려 형태를 바꾸는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을은 sā의 선행사에 관한 자신의 판단을 뒷받침하는 문법적 근거 하나를 잃는다.
ㄹ.갑은 24.18을 공성의 지위에 관한 게송으로 읽으므로, 갑을 따르는 사람은 연기하는 사물들이 관습적 명칭으로서 성립한다는 점을 부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