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odghāta
과녁을 알아야 화살이 보인다
나가르주나의 논증을 처음 읽는 사람이 가장 자주 느끼는 곤혹은 이런 것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주장을 한단 말인가? 『중론』은 “원인 안에 결과가 이미 있다면”, “과거의 법이 지금도 있다면”, “불과 땔감이 서로 다른 것이라면” 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어떤 입장을 세워 놓고 그것을 무너뜨린다. 그런데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그 입장들이 낯설고, 때로는 허수아비를 세워 놓고 때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곤혹은 대부분 나가르주나가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었는지를 모르는 데서 생긴다.
제1편에서 보았듯 나가르주나의 논증 방식은 자기 편의 교리를 앞세워 상대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이미 받아들인 전제에서 출발하여 그 전제가 스스로 무너지는 지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논증은 상대를 모르면 이해할 수 없다. 칼을 휘두르는 사람만 보고 칼끝이 향한 곳을 보지 못하면, 그 움직임은 허공을 가르는 무의미한 춤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번 편에서는 잠시 나가르주나를 떠나 그의 가장 중요한 대화 상대였던 아비달마 논사들의 세계로 들어가 보려 한다.
여기서 미리 분명히 해 둘 점이 있다. 아비달마는 중관학의 ‘적’이 아니다. 아비달마는 붓다의 가르침을 가장 정밀하게 이해하려 했던 불교 지성사의 거대한 성취이며, 나가르주나 자신도 그 어휘와 문제의식을 온전히 물려받았다. 『중론』이 다루는 오온, 십팔계, 사연(四緣), 유위의 세 가지 특징 같은 주제는 모두 아비달마가 먼저 정리해 놓은 것이다. 중관학은 아비달마의 바깥에서 날아온 공격이 아니라, 아비달마의 한가운데에서 제기된 내부 비판에 가깝다. 이 편을 읽는 동안에는 나가르주나의 편에 서지 말고, 아비달마 논사의 자리에 앉아 그들의 눈으로 세계를 보려고 애써 보자. 그들의 체계가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를 실감할수록, 나가르주나의 비판이 얼마나 대담한 것이었는지도 선명해질 것이다.
아비달마는 경험 세계를 어떤 단위로 분해했는가. 그 단위인 법(dharma)이 ‘궁극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설일체유부는 왜 과거와 미래의 법까지 실재한다고 말했는가. 그리고 이 모든 체계의 중심에 놓인 ‘자성(svabhāva)’이라는 말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며, 나가르주나는 그 말의 어떤 얼굴을 겨누었는가.
Abhidharma
아비달마, 법에 대한 탐구
아비달마(abhidharma)라는 말은 ‘~에 대하여’ 또는 ‘~을 넘어선’을 뜻하는 접두사 abhi-와 ‘법’을 뜻하는 dharma가 결합한 것이다. 그래서 한역 전통은 이 말을 ‘법에 대한 것’이라는 뜻의 대법(對法)으로 옮기기도 하고, ‘뛰어난 법’이라는 뜻의 승법(勝法)으로 풀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아비달마는 붓다가 설한 법을 대상으로 삼아 그것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분류하는 탐구를 가리킨다. 불교의 성전은 흔히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세 광주리, 곧 삼장(三藏)으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논장이 바로 아비달마 문헌들의 모음이다.
왜 이런 작업이 필요했을까. 붓다는 살아 있는 동안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상황에서 가르침을 폈다. 농부에게는 밭갈이의 비유로, 바라문에게는 제사의 언어로, 수행자에게는 선정의 체험에 기대어 말했다. 그 결과 경전에는 같은 주제가 여러 방식으로 흩어져 있고, 때로는 서로 어긋나 보이는 표현들이 공존한다. 붓다가 입멸한 뒤 제자들은 이 방대한 가르침을 정리해야 했다. 어떤 표현이 문자 그대로의 진실이고 어떤 표현이 듣는 이의 수준에 맞춘 방편인가? 경전에 나오는 수많은 용어들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런 물음에 답하려는 노력이 수백 년에 걸쳐 쌓여 아비달마가 되었다.
붓다 입멸 후 백여 년이 지나면서 교단은 계율과 교리에 대한 견해 차이로 여러 부파(部派)로 갈라졌다. 전승에 따라 18부 또는 20부를 헤아리는 이 부파들은 저마다 자기 논장을 가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오늘날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둘뿐이다. 하나는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로 전해진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의 빠알리 논장이고, 다른 하나는 북인도 까슈미르와 간다라를 중심으로 번성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의 논장으로, 주로 한역으로 전한다. 두 논장은 모두 일곱 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대칭을 이룬다.
| 설일체유부의 칠론 (한역) | 상좌부의 칠론 (빠알리) |
|---|---|
| 『발지론(發智論)』 Jñānaprasthāna 가다연니자의 저작으로 전하며, 논장의 몸통이라 하여 신론(身論)이라 부른다 | 『담마상가니(法集論)』 Dhammasaṅgaṇī 모든 법을 목록으로 열거하고 분류한다 |
|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 Saṅgītiparyāya | 『위방가(分別論)』 Vibhaṅga |
| 『법온족론(法蘊足論)』 Dharmaskandha | 『다뚜까타(界論)』 Dhātukathā |
| 『시설족론(施設足論)』 Prajñaptiśāstra | 『뿍갈라빤낫띠(人施設論)』 Puggalapaññatti |
| 『식신족론(識身足論)』 Vijñānakāya | 『까타왓투(論事)』 Kathāvatthu 다른 부파들의 견해를 논파한다. 설일체유부의 ‘모든 것이 있다’는 주장도 그 대상이다 |
| 『품류족론(品類足論)』 Prakaraṇa | 『야마까(雙論)』 Yamaka |
| 『계신족론(界身足論)』 Dhātukāya 『발지론』을 몸통으로, 나머지 여섯을 발에 비유해 육족론(六足論)이라 부른다 | 『빳타나(發趣論)』 Paṭṭhāna 법들 사이의 스물네 가지 조건 관계를 분석하는 방대한 논서 |
설일체유부의 사상은 이 칠론 위에 쌓인 거대한 주석서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현장(玄奘)이 200권으로 옮긴 이 백과사전적 문헌은 『발지론』의 구절 하나하나를 놓고 여러 논사들의 견해를 대비하고 정통 견해를 확정한다. 이 학파의 정통파를 ‘비바사사(毘婆沙師, Vaibhāṣika)’라 부르는 것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4~5세기경 세친(世親, Vasubandhu)은 이 방대한 체계를 게송 약 600수와 그 자주(自註)로 압축한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śabhāṣya)』을 지었다. 『구사론』은 명쾌한 정리와 날카로운 비판 정신으로 이후 인도, 티베트, 동아시아 불교 전체에서 아비달마의 표준 교과서가 되었다. 이 편에서 인용하는 유부의 명제들도 대부분 『구사론』에서 가져온 것이다.
세친의 『구사론』은 나가르주나보다 두 세기가량 뒤의 저작이다. 그러므로 나가르주나가 『구사론』을 읽고 비판한 것은 아니다. 다만 『구사론』은 그 이전 수백 년간 쌓인 유부의 교리를 가장 명료하게 정리한 문헌이기에, 나가르주나가 마주했던 사유의 윤곽을 재구성하는 데 가장 좋은 창이 된다. 나가르주나 당시 유부의 교리가 이미 『대비바사론』 단계에 가까이 와 있었는지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Dharma-vibhāga
두 개의 원소표
경전 속의 붓다는 이미 경험을 분해하는 여러 틀을 제시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오온(五蘊)이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물질(색), 느낌(수), 지각(상), 의지적 형성(행), 의식(식)이라는 다섯 무더기의 모임일 뿐이라는 가르침이다. 여기에 여섯 감각기관과 여섯 대상을 짝지은 십이처(十二處), 거기에 여섯 가지 의식을 더한 십팔계(十八界)가 있다. 이 틀들은 모두 한 가지 목적을 공유한다. 경험 어디를 뒤져도 영원하고 독립된 자아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아비달마는 이 분석을 한 걸음 더 밀고 나갔다. 오온 가운데 ‘행(行)’의 무더기는 사실 온갖 정신 작용을 뭉뚱그려 담은 큰 자루와 같다. 의도, 주의, 믿음, 탐욕, 성냄, 부끄러워함, 게으름 같은 것들이 모두 여기 들어간다. 아비달마 논사들은 이 자루를 열어 그 내용물을 하나하나 꺼내 이름을 붙이고, 각각이 어떤 특징을 가지며 어떤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지를 정밀하게 기록했다. 그렇게 해서 두 개의 거대한 ‘원소표’가 완성되었다. 화학의 주기율표가 온갖 물질을 백여 가지 원소의 조합으로 설명하듯, 이 표들은 온갖 경험을 수십 가지 법의 조합으로 설명한다.
두 표를 나란히 놓으면 공통점과 차이가 함께 드러난다. 둘 다 마음과 정신 작용과 물질을 구별하고,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유위법(有爲法)과 조건을 떠난 무위법(無爲法)을 구별한다. 둘 다 정신 작용의 목록이 가장 길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아비달마는 무엇보다 마음의 과학이었고, 그 목적은 번뇌가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제거되는지를 정확히 아는 데 있었다. 한편 차이도 뚜렷하다. 유부는 물질도 마음도 아닌 제3의 범주인 ‘심불상응행법’을 세웠는데, 여기에는 법이 생겨나고 머물고 변하고 사라지게 하는 힘인 생·주·이·멸의 네 가지 특징, 그리고 어떤 법을 특정한 흐름에 붙들어 매는 힘인 ‘득(得)’ 같은 것들이 들어간다. 무위법도 유부는 셋을 헤아리지만 상좌부는 열반 하나만 인정한다.
그러나 이 편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표의 세부가 아니라 표라는 발상 자체다. 이 표들은 세계에 대한 하나의 근본적인 믿음을 전제한다. 경험을 분석해 들어가면 결국 더는 쪼개지지 않는 최종 단위에 이르며, 그 단위들의 목록은 유한하고 확정적이라는 믿음이다. 마치 모든 물질이 백여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고 그 원소들은 저마다 정해진 원자 번호를 가지듯이, 모든 경험은 몇십 가지 법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법은 저마다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다. 나가르주나가 흔들고자 한 것은 바로 이 믿음의 밑바닥이다.
Satya-dvaya
부수면 사라지는 것, 남는 것
원소표가 있다는 것은 곧 존재의 두 층위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표에 오른 법들은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이고, 표에 오르지 못한 항아리나 숲이나 사람은 그 법들의 조합에 붙인 이름일 뿐이다. 아비달마는 이 두 층위를 각각 승의유(勝義有, paramārtha-sat), 곧 ‘궁극적 의미에서 있는 것’과 세속유(世俗有, saṃvṛti-sat), 곧 ‘관습적 의미에서 있는 것’으로 불렀다. 그렇다면 무엇이 승의유이고 무엇이 세속유인지는 어떻게 가려내는가? 『구사론』은 이에 대한 명쾌한 기준을 하나의 게송으로 제시한다.
घटाम्बुवत्संवृतिसत् परमार्थसदन्यथा ॥ yatra bhinne na tadbuddhir anyāpohe dhiyā ca tat |
ghaṭāmbuvat saṃvṛtisat paramārthasad anyathā || 若彼覺破便無 慧析餘亦爾
如瓶水世俗 異此名勝義 부서졌을 때 그것이라는 인식이 없어지는 것, 그리고 지혜로 다른 것들을 떼어 내었을 때
그것이라는 인식이 없어지는 것은, 항아리나 물처럼 세속유이다. 그와 다른 것이 승의유이다.
이 게송은 두 가지 시험을 제시한다. 첫째는 물리적 분해의 시험이다. 항아리를 망치로 부수면 사금파리들만 남고 ‘항아리’라는 인식은 사라진다. 따라서 항아리는 세속유다. 둘째는 개념적 분석의 시험이다. 물은 망치로 부술 수 없지만, 지혜로 분석하여 그 색깔과 냄새와 맛과 감촉 같은 요소들을 하나씩 떼어 내면 결국 ‘물’이라는 인식은 남지 않는다. 따라서 물도 세속유다. 반면 어떤 것이 이 두 시험을 모두 견딘다면, 곧 쪼개도 그것이라는 인식이 남고 다른 요소들을 떼어 내도 여전히 그것으로 인식된다면, 그것은 승의유다. 예컨대 한 찰나의 ‘푸른색’이라는 법은 더 작은 조각으로 부술 수 없고, 다른 무엇으로 환원하여 분석해 낼 수도 없다. 푸른색은 그냥 푸른색으로 인식될 뿐이다.
이 기준은 대단히 설득력 있다. 우리의 직관과도 잘 맞는다. 항아리나 숲이 ‘실제로는’ 무엇인지 물으면 우리도 그것을 이루는 더 작은 것들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 기준에는 주목할 만한 함의가 숨어 있다. 승의유를 판정하는 기준이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음’이라는 점이다. 어떤 것이 궁극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부분들이나 다른 요소들에 기대지 않고 그 자체로 그것으로서 인식된다는 것이다. 제1편에서 본 나가르주나의 자성 정의, 곧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음’과 이 기준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는지를 기억해 두자. 이 편의 마지막 절에서 이 고리가 다시 등장한다.
덧붙여, 이 두 층위의 구분은 중관학의 이제설(二諦說)과 이름이 같다. 세속제와 승의제라는 두 진리의 틀은 아비달마가 먼저 마련한 것이고, 중관학은 그 틀을 물려받되 내용을 바꾸어 놓았다. 아비달마에서 승의의 자리에는 법들이 놓이지만, 중관학에서 승의의 자리에는 법들의 공성이 놓인다. 이 역전은 제8편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Svalakṣaṇa
자기 특징을 지니는 것
그렇다면 법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구사론』은 첫머리에서 ‘법’이라는 말을 이렇게 풀이한다.
이 정의는 법(dharma)이라는 낱말의 어근 √dhṛ(지니다, 떠받치다)를 활용한 어원 풀이다. 법이란 무엇인가를 지니는 것이며, 그것이 지니는 것은 ‘자기 특징’, 곧 자상(自相, svalakṣaṇa)이다. 예를 들어 물질을 이루는 네 가지 요소 가운데 땅의 요소는 단단함을, 물의 요소는 축축함을, 불의 요소는 뜨거움을, 바람의 요소는 움직임을 자기 특징으로 지닌다. 정신 작용 가운데 느낌(受)은 ‘느껴짐’을, 지각(想)은 ‘표상을 취함’을 자기 특징으로 지닌다. 각각의 법은 이 고유한 특징 덕분에 다른 모든 법과 구별되며, 원소표의 한 칸을 차지할 자격을 얻는다.
놀랍게도 빠알리 전통의 주석 문헌에서도 거의 같은 모양의 정의를 만날 수 있다. 『앗타살리니』를 비롯한 주석서들은 법을 이렇게 풀이한다.
여기서 ‘고유의 성질’로 옮긴 sabhāva는 산스크리트 svabhāva, 곧 자성에 해당하는 빠알리어다. 인도 대륙의 북쪽과 남쪽에서 서로 독립적으로 발전한 두 아비달마 전통이 법을 ‘자기의 무엇을 지니는 것’으로 정의하는 데 일치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법에 대한 이런 이해가 어느 한 부파의 특이한 교리가 아니라 아비달마라는 사유 방식 자체에 깊이 뿌리내린 것임을 보여 준다.
자상과 공상, 그리고 자성
아비달마는 법의 특징을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앞에서 본 자상(自相), 곧 그 법에만 고유한 특징이다. 다른 하나는 공상(共相, sāmānyalakṣaṇa), 곧 여러 법에 공통된 특징이다. 모든 유위법이 무상하고 괴로우며, 모든 법이 공하고 무아라는 것은 공상에 해당한다. 단단함은 땅의 요소만의 것이지만 무상함은 땅의 요소와 느낌과 의식 모두의 것이다. 그러니 어떤 법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공상이 아니라 자상이다.
자성(svabhāva)이라는 말은 이 자상과 매우 가까운 자리에서 쓰인다. 문헌에 따라 두 말은 거의 바꿔 쓸 수 있는 동의어처럼 쓰이기도 한다. 법의 자성이란 그 법을 바로 그 법이게 하는 것, 다른 법과 섞이지 않는 그것만의 본성이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단단함이 단단함이고 축축함이 축축함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러나 설일체유부는 이 자성에 훨씬 더 무거운 짐을 지웠다. 다음 절에서 볼 삼세실유설이 그것이다.
‘단단함’이라는 특징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단단함은 무엇에 대해 단단한가? 손가락이 누를 때 저항하는 것, 다른 것이 파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단단함이라면, 단단함이라는 특징은 누르는 손가락이나 파고드는 다른 것과의 관계 없이도 성립하는가? 이 물음을 기억해 두면 제1편에서 본 ‘긴 막대’의 예와 연결되는 지점이 보일 것이다.
Traikālya
모든 것은 있다: 삼세실유
설일체유부라는 이름은 ‘모든 것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sarvam asti vādin)’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모든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시간대에 걸친 모든 법을 가리킨다. 현재의 법만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과거의 법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법도 실재한다는 것, 이것이 유부의 가장 특징적인 교리인 삼세실유(三世實有)다. 상식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이 주장을 유부는 왜 내세웠을까. 『구사론』은 유부가 제시한 근거를 네 가지로 정리한다.
तदस्तिवादात् सर्वास्तिवादा इष्टाः sarvakālāstitā uktatvād dvayāt sadviṣayāt phalāt |
tadastivādāt sarvāstivādā iṣṭāḥ 三世有由說 二有境果故
說三世有故 許說一切有 모든 시간에 걸쳐 있다. (경전에) 설해졌기 때문이며, 두 가지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며,
(인식이) 실재하는 대상을 갖기 때문이며, 결과 때문이다. 그것이 있다고 말하기에 설일체유부로 인정된다.
| 근거 | 내용 | 숨은 전제 |
|---|---|---|
| ① 경전의 말씀 uktatvāt | 붓다는 제자들에게 과거의 물질과 미래의 물질에 대해서도 집착을 버리라고 가르쳤다. 과거와 미래의 물질이 없다면 그것을 싫어하여 떠나라는 가르침은 무의미하다. | 가르침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실재해야 한다 |
| ② 두 가지 조건 dvayāt | 경전은 의식이 감각기관과 대상, 두 가지에 의존하여 생겨난다고 한다. 마음(의근)이 과거나 미래의 법을 대상으로 할 때에도 그 대상이 있어야 의식이 생길 수 있다. | 의식이 생기려면 실재하는 조건이 필요하다 |
| ③ 대상이 있는 인식 sadviṣayāt | 우리는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예측한다. 인식은 언제나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이므로, 과거와 미래를 인식할 때 그 대상은 어떤 방식으로든 있어야 한다. | 대상 없는 인식은 불가능하다 |
| ④ 결과 phalāt | 과거에 지은 업이 지금 또는 먼 미래에 과보를 낳는다. 과거의 업이 완전히 사라져 없다면 어떻게 결과를 낳을 수 있겠는가. | 없는 것은 원인이 될 수 없다 |
네 근거를 나란히 놓고 보면 하나의 공통된 직관이 드러난다. 없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직관이다. 없는 것은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의식을 낳는 조건이 될 수 없으며, 결과를 낳는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런데 과거와 미래의 법은 분명히 인식되고, 업은 분명히 과보를 낳는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의 법도 어떤 방식으로든 있어야 한다. 유부의 논리는 이렇게 탄탄하게 짜여 있다. 이 직관이 제1편 연습문제 5번에서 본 『회쟁론』 논적의 전제, 곧 ‘자성 없는 말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전제와 얼마나 닮았는지 눈여겨보자.
체는 항상하고 작용은 찰나이다
그런데 여기서 곧바로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 과거와 미래의 법도 현재의 법과 똑같이 실재한다면, 도대체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무엇으로 구별되는가? 유부의 대답은 법의 ‘체(體)’와 ‘작용(作用)’을 나누는 것이었다. 법의 체, 곧 그 법의 자성은 세 시간대에 걸쳐 변함없이 존재한다. 이를 법체항유(法體恒有)라 한다. 다만 그 법이 결과를 끌어내는 작용(kāritra)을 발휘하는 것은 오직 한 찰나, 곧 현재뿐이다. 작용을 아직 발휘하지 않은 법은 미래의 법이고, 지금 발휘하고 있는 법은 현재의 법이며, 이미 발휘를 마친 법은 과거의 법이다.
『대비바사론』은 이 문제를 두고 유부 안의 네 논사가 서로 다른 설명을 내놓았다고 전한다. 법이 시간대를 옮겨 가며 무엇이 달라지는가를 두고 각자 다른 답을 제시한 것이다.
| 논사 | 무엇이 달라지는가 | 비유와 설명 |
|---|---|---|
| 법구(法救) Dharmatrāta | 존재 양태(類) | 금 그릇을 녹여 다른 모양의 그릇을 만들면 모양은 바뀌어도 금은 그대로다. 법도 시간대에 따라 존재 양태만 바뀐다. 『구사론』은 이 설이 수론 학파의 전변설과 닮았다고 비판한다. |
| 묘음(妙音) Ghoṣaka | 특징(相) | 한 여인에게 애착하는 남자가 다른 여인들에 대한 애착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듯, 과거의 법은 과거의 특징과 결합하되 현재와 미래의 특징에서 완전히 떨어지지 않는다. 세 시간이 뒤섞인다는 비판을 받는다. |
| 세우(世友) Vasumitra | 위치(位) | 같은 산가지 하나가 일의 자리에 놓이면 1, 백의 자리에 놓이면 100이 되듯, 법은 체가 바뀌지 않은 채 놓인 위치, 곧 작용의 상태에 따라 과거·현재·미래로 불린다. 유부의 정통설로 인정된다. |
| 각천(覺天) Buddhadeva | 상대적 관계(待) | 한 여인이 자기 어머니에게는 딸이고 자기 딸에게는 어머니이듯, 법은 앞뒤의 관계에 따라 과거·현재·미래로 불린다. 한 시간대 안에 세 시간이 모두 있게 된다는 비판을 받는다. |
이 도식을 오래 들여다보면 기묘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유부에게 유위법은 분명 조건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법의 체가 미래에 이미 있고 과거에도 여전히 있다면, 조건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조건은 법의 체를 새로 만들어 내지 않는다. 조건은 이미 있는 체가 현재라는 자리에서 작용을 발휘하도록 할 뿐이다. 그렇다면 법의 체 자체는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이 지점을 기억해 두자. 제9절에서 이것이 나가르주나의 비판과 맞물리는 방식을 살펴볼 것이다.
삼세실유설은 불교 안에서도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경전(sūtra)만을 권위로 인정한다는 뜻의 경량부(經量部, Sautrāntika)는 오직 현재의 법만 실재하며, 과거는 이미 없는 것이고 미래는 아직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업이 과보를 낳는 것도 과거의 업이 어딘가에 존속하기 때문이 아니라, 업이 마음의 흐름에 남긴 ‘종자(種子)’가 이어지며 변화하다가 조건을 만나 결과를 맺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흥미롭게도 『구사론』의 저자 세친 자신이 게송에서는 유부의 교리를 서술하면서도, 자주에서는 곳곳에서 경량부의 편에 서서 유부를 비판한다. 자성과 시간을 둘러싼 논쟁은 나가르주나만의 것이 아니라 아비달마 전체를 관통하는 살아 있는 쟁점이었다.
Pratyaya
네 가지 조건
법이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면, 그 조건은 무엇인가. 아비달마는 인과 관계도 원소표처럼 체계적으로 분류했다. 유부는 여섯 가지 원인(六因)과 네 가지 조건(四緣)과 다섯 가지 결과(五果)를 세웠고, 상좌부의 『빳타나』는 무려 스물네 가지 조건 관계(paccaya)를 분석했다. 이 가운데 네 가지 조건은 『중론』의 첫 품이 정면으로 다루는 주제이므로, 여기서 미리 익혀 두자. 예로 눈으로 꽃을 보는 한 찰나의 인식을 들어 본다.
| 조건 | 뜻 | 꽃을 보는 인식의 경우 |
|---|---|---|
| 인연(因緣) hetu-pratyaya | 결과를 직접 낳는 원인으로서의 조건. 씨앗과 싹의 관계처럼 결과와 가장 긴밀하게 이어진 것 | 그 인식과 함께 일어나 서로를 떠받치는 정신 작용들, 그리고 앞선 같은 부류의 법 |
| 등무간연(等無間緣) samanantara-pratyaya | 간격 없이 바로 앞서서 다음 마음이 일어날 자리를 비켜 주는 조건 | 바로 앞 찰나에 소멸한 마음 |
| 소연연(所緣緣) ālambana-pratyaya | 마음이 붙잡는 대상으로서의 조건 | 꽃의 빛깔과 모양 |
| 증상연(增上緣) adhipati-pratyaya | 결과가 생기도록 힘을 보태거나 적어도 방해하지 않는 모든 조건 | 눈(안근), 빛, 그리고 이 인식을 가로막지 않는 세상의 모든 것 |
나가르주나는 『중론』 제1품에서 이 네 가지 조건을 그대로 인용한 뒤, 그것들이 과연 결과를 ‘생겨나게 한다’고 할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그가 인용하는 게송은 아비달마의 정식을 충실하게 옮겨 놓은 것이다.
तथैवाधिपतेयं च प्रत्ययो नास्ति पञ्चमः ॥ catvāraḥ pratyayā hetuś cārambaṇam anantaram |
tathaivādhipateyaṃ ca pratyayo nāsti pañcamaḥ || 因緣次第緣 緣緣增上緣
四緣生諸法 更無第五緣 조건은 넷이다. 원인, 대상, 바로 앞선 것,
그리고 증상하는 것. 다섯째 조건은 없다.
이 게송이 나가르주나 자신의 주장인지 논적의 주장을 옮긴 것인지를 두고 주석가들의 해석이 갈리지만, 적어도 여기서 나가르주나가 아비달마의 용어와 체계를 그대로 받아 논의를 시작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는 아비달마의 바깥에서 새 체계를 들고 오지 않는다. 아비달마의 체계 안으로 들어가서, 그 체계의 부품 하나하나를 손에 들고 무게를 달아 본다. 네 가지 조건이 법을 생겨나게 한다면, 결과는 조건 안에 이미 있었는가, 없었는가? 이미 있었다면 새로 생겨날 필요가 없고, 없었다면 없는 것이 어떻게 생겨나는가? 이 물음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제5편에서 따라가 보자.
Theravāda-sthāna
빠알리 아비담마의 자리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이런 물음을 품게 될 것이다. 오늘날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에서 살아 있는 전통으로 이어지는 상좌부의 아비담마는 나가르주나의 비판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상좌부도 법을 ‘자기 고유의 성질(sabhāva)을 지니는 것’으로 정의하고, 궁극법과 관습적 개념을 구별한다. 그렇다면 나가르주나의 화살은 상좌부에도 그대로 날아가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우선 분명한 사실부터 확인하자. 상좌부는 설일체유부의 삼세실유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상좌부 논장의 『까타왓투(論事)』는 첫 품에서부터 ‘모든 것이 있다는 논의(Sabbamatthikathā)’를 다루며 과거와 미래의 법이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있다는 주장을 논파한다. 상좌부에서 법은 찰나적으로 생겨나 머물다 사라지며, 과거의 법은 이미 소멸한 것이다. 따라서 ‘체는 삼세에 걸쳐 항상하고 조건은 작용만 일으킨다’는 유부의 구도는 상좌부에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상좌부는 모든 유위법이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paṭiccasamuppanna)이며, 어떤 법도 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한다. 『빳타나』의 스물네 가지 조건 관계는 법들이 서로 얽힌 그물망을 극도로 정밀하게 그려 낸다. 이 때문에 일부 현대 연구자들은 상좌부의 sabhāva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존재’라는 강한 의미가 아니라, 단지 ‘한 법을 다른 법과 구별해 주는 고유한 특징’이라는 약한 의미로 쓰였다고 해석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나가르주나가 부정한 자성과 상좌부가 말하는 고유한 성질은 이름만 같을 뿐 서로 다른 것이다.
반면 다른 연구자들은, 상좌부 역시 궁극법을 ‘더 이상 분석되지 않는 최종 단위’로 세우고 그 목록을 확정적으로 제시하는 한, 나가르주나가 문제 삼은 사유 방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고 본다. 이 논쟁은 제1편에서 말한 ‘분석은 어디에서 멈추는가’라는 물음과 직결되며, 오늘날에도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다. 이 연재는 어느 한쪽의 결론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판단을 내리려면 무엇을 따져 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이 절의 목적이다.
| 쟁점 | 설일체유부 | 경량부 | 상좌부 |
|---|---|---|---|
| 법의 정의 | 자상을 지니는 것 | 유부의 틀을 대체로 공유하되 법의 수를 줄임 | 자기 고유의 성질(sabhāva)을 지니는 것 |
| 과거·미래의 법 | 실재한다 (삼세실유) | 실재하지 않는다 (현재만 실재) | 실재하지 않는다 (『까타왓투』에서 유부 논파) |
| 조건의 역할 | 체는 항상하고, 조건은 작용을 일으킴 | 조건에 따라 찰나적으로 생멸 | 조건에 따라 찰나적으로 생멸 (24조건) |
| 업과 과보의 연결 | 과거의 업이 실재하기에 가능 | 마음의 흐름에 남은 종자의 상속 | 마음 흐름의 상속과 업의 조건 관계 |
| 무위법 | 허공, 택멸, 비택멸 | 실재하는 법이 아니라 부재에 붙인 이름 | 열반 하나 |
Lakṣya
자성의 두 얼굴
이제 다시 나가르주나에게 돌아갈 준비가 되었다. 제1편에서 우리는 『중론』 제15품이 자성을 ‘만들어지지 않고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을 보았다. 그 규정 바로 앞에 놓인 첫 게송은 이렇게 말한다.
हेतुप्रत्ययसम्भूतः स्वभावः कृतको भवेत् ॥ na saṃbhavaḥ svabhāvasya yuktaḥ pratyayahetubhiḥ |
hetupratyayasaṃbhūtaḥ svabhāvaḥ kṛtako bhavet || 眾緣中有性 是事則不然
性從眾緣出 即名為作法 자성이 조건과 원인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원인과 조건으로부터 생겨난 자성이라면,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 게송의 논리를 아비달마의 입장에 대입해 보자. 아비달마는 유위법이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고 인정한다. 이것은 불교의 연기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니 부정할 수 없다. 동시에 아비달마는 각각의 법이 자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자성은 원인과 조건에서 생겨난 것인가, 아닌가? 나가르주나는 이 질문을 두 갈래로 몰아세운다.
이 논증은 강력해 보인다. 그러나 아비달마 논사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그는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당신은 ‘자성’이라는 말을 우리가 쓰는 뜻과 다르게 쓰고 있다. 우리가 법이 자성을 지닌다고 할 때, 그것은 땅의 요소가 단단함을 지니고 느낌이 느껴짐을 지닌다는 뜻이다. 단단함은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도 여전히 단단함이다. 우리는 자성을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존재’라는 뜻으로 쓴 적이 없다.” 이 반박은 자성이라는 한 낱말에 두 개의 얼굴이 있음을 드러낸다.
한 법을 다른 법과 구별해 주는 고유한 특징. ‘무엇임’에 대한 답. 단단함, 축축함, 느껴짐. 이 의미의 자성은 그 법이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과 충돌하지 않아 보인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은 채 스스로 존재함. ‘어떻게 있음’에 대한 답. 『중론』 15.2가 규정하는 자성이며, 조건에 의한 생겨남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렇다면 나가르주나는 아비달마가 말한 첫째 의미의 자성을 슬그머니 둘째 의미로 바꿔치기한 것일까? 이 물음은 현대 불교학에서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어떤 학자들은 나가르주나가 실제로 이 두 의미를 뒤섞는 애매어의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한다. 다른 학자들은 아비달마 체계가 겉으로는 첫째 의미만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둘째 의미를 떠맡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안고 있었다고 옹호한다. 옹호하는 쪽이 드는 근거는 이 편에서 이미 우리가 만난 것들이다. 승의유를 판정하는 『구사론』의 기준이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음’이었다는 점, 그리고 유부의 삼세실유설에서 조건은 법의 체를 만들지 않고 작용만 일으킨다는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유부의 법은 조건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체를 지니는 셈이 된다.
이 논쟁의 어느 편이 옳은지는 이 편에서 결론 내리지 않으려 한다. 이 절의 목적은 다음 두 가지를 분명히 하는 데 있다. 첫째, 나가르주나의 비판이 아비달마에 대해 효력을 갖는지는 아비달마 각 학파가 실제로 어떤 전제들을 떠맡고 있었는지에 달려 있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설일체유부에 대한 평가와 상좌부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같을 필요가 없다. 이 두 가지를 쥐고 있으면, 이번 편의 연습문제 5번을 풀 준비는 다 된 셈이다.
Upasaṃhāra
과녁 앞에서
이번 편에서 우리는 아비달마 논사들의 자리에 앉아 그들의 눈으로 세계를 보았다. 그 세계는 결코 소박하지 않다. 경험을 끝까지 분석하여 유한한 수의 궁극 요소로 환원하고, 그 요소들이 저마다 고유한 특징을 지닌 채 조건에 따라 찰나찰나 명멸하며 세계를 짜 나간다는 그림은, 오늘날의 과학적 세계관과 견주어도 손색없을 만큼 체계적이고 우아하다. 게다가 이 그림은 무아의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고, 번뇌가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제거되는지를 정밀하게 기술함으로써 수행의 지도 역할까지 해냈다.
나가르주나가 겨눈 것은 이 그림 전체가 아니라, 그 그림을 떠받치는 한 개의 쐐기, 곧 ‘분석의 끝에는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 무엇이 남는다’는 믿음이다. 수레는 무너져도 법은 남는다는 믿음, 과거로 흘러가도 법의 체는 남는다는 믿음. 나가르주나는 이 ‘남는 것’을 하나씩 손에 들고, 그것이 정말로 조건들과 관계들을 모두 떼어 낸 뒤에도 남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다음 편에서 우리는 그가 이 물음을 통해 도달한 결론, 곧 연기와 공이 하나라는 사중 등식을 한 글자씩 읽어 가게 될 것이다.
이 편의 요점
- 아비달마는 붓다의 가르침을 체계화하려는 탐구로, 오늘날 설일체유부(한역)와 상좌부(빠알리)의 두 논장이 온전히 전한다. 유부 교리의 표준 정리는 세친의 『구사론』이다.
- 아비달마는 경험을 유한한 수의 궁극 요소인 법으로 분석했다. 유부는 오위칠십오법을, 상좌부는 마음·마음부수·물질·열반의 네 궁극법을 세운다.
- 『구사론』 6.4에 따르면 부수거나 분석했을 때 그 인식이 사라지는 것은 세속유, 사라지지 않는 것은 승의유다. 승의유의 기준은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음’이다.
- 법은 ‘자기 특징(자상)을 지니는 것’이며, 자성은 이 자상과 가까운 뜻으로 쓰인다. 유부는 여기에 삼세실유와 법체항유를 더해, 체는 삼세에 항상하고 조건은 현재의 작용만 일으킨다고 보았다.
- 『중론』 15.1은 유위법의 자성이 인연에서 생긴다면 ‘만들어진 자성’이라는 모순이 된다고 비판한다. 이 비판의 효력은 ‘자성’의 식별적 의미와 존재론적 의미, 그리고 각 학파가 실제로 떠맡은 전제에 달려 있다.
용어 정리
| 우리말 | 산스크리트 | 빠알리 | 한역 | 뜻 |
|---|---|---|---|---|
| 아비달마 | abhidharma | abhidhamma | 阿毘達磨·對法 | 법에 대한 체계적 탐구, 논장 |
| 승의유 | paramārtha-sat | paramattha | 勝義有 | 궁극적 의미에서 실재하는 것 |
| 세속유 | saṃvṛti-sat | sammuti / paññatti | 世俗有 | 관습적 의미에서 있는 것 |
| 자상 | svalakṣaṇa | salakkhaṇa | 自相 | 한 법에만 고유한 특징 |
| 공상 | sāmānyalakṣaṇa | sāmaññalakkhaṇa | 共相 | 여러 법에 공통된 특징 (무상·고·무아 등) |
| 삼세실유 | sarvam asti | — | 三世實有 | 과거·현재·미래의 법이 모두 실재함 |
| 작용 | kāritra | — | 作用 | 법이 결과를 끌어내는 힘, 현재에만 있음 |
| 사연 | catvāraḥ pratyayāḥ | — | 四緣 | 인연·등무간연·소연연·증상연 |
제3편 「연기가 곧 공이다」에서는 『중론』 제24품으로 들어간다. “모든 것이 공하다면 사성제가 무너진다”는 논적의 반론, 그리고 그것을 거꾸로 돌려주는 나가르주나의 응답을 따라간 뒤, 연기·공·가명·중도의 사중 등식 24.18을 한 글자씩 풀어 그 논리 구조를 따져 본다.
Abhyāsa
연습문제
다섯 문제는 쉬운 것부터 어려운 것 순서로 놓여 있다. 선택지를 누르면 바로 채점되며, 채점 후 해설을 펼쳐 볼 수 있다. 마지막 문제는 법학적성시험(LEET) 언어이해 영역의 형식을 따랐다.
해설 펼치기
정답은 ②이다. 아비달마의 ‘법’은 경험을 분석한 끝에 도달하는 궁극 요소이며, 『구사론』은 이를 ‘자기 특징을 지니기 때문에 법’이라고 정의한다.
① ‘법’이라는 말이 가르침을 뜻하기도 하지만, 아비달마가 분석 단위로 삼는 법은 그와 구별되는 전문적 의미다. ③ 브라만교 전통 등에서 쓰이는 규범으로서의 ‘다르마’에 가까운 의미로, 아비달마의 분석 단위와는 다르다. ④ 아비달마의 분석은 오히려 그런 영원한 주체가 어디에도 없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⑤ 항아리나 수레는 부수거나 분석하면 그 인식이 사라지는 세속유로, 법들의 모임에 붙인 이름이다.해설 펼치기
정답은 ⑤이다. 한 찰나의 푸른색은 더 작은 조각으로 부술 수 없고, 다른 요소들로 분석하여 떼어 낼 수도 없다. 두 시험을 모두 견디므로 승의유다.
① 부수면 사금파리만 남고 ‘항아리’라는 인식이 사라진다. 첫째 시험(물리적 분해)에 걸리는 세속유다. ② 망치로 부술 수는 없지만, 지혜로 색·향·미·촉 등을 떼어 내면 ‘물’이라는 인식이 남지 않는다. 둘째 시험(개념적 분석)에 걸리는 세속유다. 게송이 든 대표적 예다. ③ 나무들을 하나씩 떼어 내면 ‘숲’이라는 인식이 사라진다. 세속유다. ④ 사람은 오온이라는 법들의 모임에 붙인 이름이므로 분석하면 그 인식이 사라진다. 아비달마의 무아 논증이 바로 이 점에 기댄다.해설 펼치기
정답은 ②이다. 세우의 ‘위치(位)’설은 같은 산가지가 놓인 자리에 따라 1이나 100이 되듯, 체가 변하지 않은 채 작용의 상태라는 ‘자리’에 따라 삼세가 구별된다고 본다.
① 법체항유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유부에서 과거의 법도 체는 그대로 실재한다. ③ 조건이 체를 새로 만든다는 설명은 유부가 아니라 현재만 실재한다고 보는 쪽(경량부 등)의 구도에 가깝다. 유부에서 조건은 체가 아니라 작용을 일으킨다. ④ 존재 양태(類)의 변화를 말한 법구의 설이다. 『구사론』은 이것이 수론 학파의 전변설과 닮았다고 비판한다. ⑤ 상대적 관계(待)를 말한 각천의 설이다. 한 시간대 안에 세 시간이 뒤섞인다는 비판을 받는다.해설 펼치기
정답은 ③이다. 15.1의 힘은 나가르주나가 새로운 전제를 들여오는 데서가 아니라, 아비달마가 이미 받아들인 ‘유위법은 인연에서 생긴다’는 전제와 ‘자성’이라는 말의 규정을 맞붙여 모순을 드러내는 데서 나온다. 그림 4의 왼쪽 갈래가 바로 이것이다.
① 아비달마는 유위법이 인연에서 생긴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인정이 논증의 출발점이 된다. ② 나가르주나는 인과 연의 자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중론』 제1품은 바로 조건들 자체의 자성을 검토한다. 15.1이 조건의 자성을 전제한다고 볼 근거는 없다. ④ 15.1은 자성의 규정과 ‘인연에서 생김’만을 결합할 뿐 삼세실유를 전제하지 않는다. 삼세실유는 유부가 존재론적 자성을 떠맡았다는 ‘옹호’ 논변에서 추가 근거로 쓰일 수 있을 뿐, 15.1 자체의 성립 조건은 아니다. ⑤ 게송은 조건에서 생겨난 자성이라면 이미 ‘만들어진 것’이 되어 자성이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조건에서 생긴 자성을 인정하는 진술은 게송의 취지와 정반대다.『중론』 제15품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다. (가) 자성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며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나) 유위법은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난다. (다) 따라서 유위법은 자성을 가질 수 없다. 한 비판자는 이 논증이 ‘자성’의 두 의미를 뒤섞는 애매어의 오류를 범한다고 본다. 아비달마 논사들이 법을 ‘자기 특징을 지니는 것’이라 정의할 때, 자성은 한 법을 다른 법과 구별해 주는 고유한 특징, 예컨대 땅의 요소의 단단함이나 느낌의 느껴짐을 뜻한다. 이를 식별적 의미라 하자. 이 의미의 자성은 법이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난다는 것과 충돌하지 않는다. 단단함은 조건에 따라 생겨나도 여전히 단단함이기 때문이다. 반면 (가)의 자성은 독립적 존재를 뜻하는데, 이를 존재론적 의미라 하자. 비판자에 따르면 나가르주나는 아비달마가 주장한 식별적 자성을 존재론적 자성으로 바꿔 읽은 뒤 모순을 도출했으므로, 그의 논증은 아비달마에 대해 과녁을 벗어났다.
이에 대해 옹호자는, 아비달마가 식별적 의미의 자성만을 주장했다면 비판자가 옳겠지만 아비달마의 체계 안에는 존재론적 의미를 끌어들이는 요소가 있다고 응수한다. 첫째,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을 판정하는 기준이 ‘분석해도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라면, 궁극적 실재성은 그것이 부분이나 다른 법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데서 확보되는 셈이다. 둘째, 설일체유부에서 법의 체는 세 시간대에 걸쳐 동일하며 조건은 체를 만들지 않고 현재의 작용만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체는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된다. 따라서 유부는 식별적 자성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법의 궁극적 실재성의 근거로 삼음으로써 존재론적 자성을 암묵적으로 떠맡았다는 것이다.
이 논쟁은 상좌부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상좌부는 『까타왓투』에서 삼세실유설을 논파했고, 주석 문헌에서 법을 ‘자기 고유의 성질을 지니는 것’이라 정의하면서도 모든 유위법이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옹호자의 두 번째 근거는 상좌부에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다만 상좌부 역시 궁극적 법과 관습적 명칭을 구별하므로, 첫 번째 근거가 적용되는지는 궁극적 법의 궁극성을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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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④(ㄱ, ㄴ, ㄹ)이다. 이 문제는 논증을 전제 단위로 분해하는 능력, 두 개념(식별적/존재론적 자성)의 경계를 정확히 유지하는 능력, 그리고 한 논변의 효력이 적용 대상의 전제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조건문의 형태로 추적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ㄱ. 옳다. 비판자는 식별적 의미의 자성이 ‘법이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난다는 것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나)는 바로 조건에 의존한 생겨남을 말하므로, (나)가 참이어도 식별적 자성은 부정되지 않는다. (나)가 부정할 수 있는 것은 (가)의 존재론적 자성뿐이다. ㄴ. 옳다. 두 번째 근거는 ‘조건은 체를 만들지 않고’, 따라서 ‘체는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된다’고 말한다. (가)는 자성의 조건으로 ‘만들어지지 않음’과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음’ 두 가지를 제시하는데, 유부의 체는 적어도 첫째 조건을 충족한다. 둘째 조건까지 충족하는지는 글에서 직접 확정되지 않으므로, ‘적어도 하나’라는 신중한 표현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ㄷ. 옳지 않다. 옹호자의 논변은 식별적 자성 그 자체가 아니라, 아비달마 체계 안의 특정한 요소들(승의유의 기준, 삼세실유)이 존재론적 자성을 끌어들인다는 데 기댄다. 셋째 문단은 두 번째 근거가 상좌부에 그대로 적용되지 않으며 첫 번째 근거의 적용 여부도 조건부라고 말한다. 따라서 옹호자가 성공하더라도 효력은 각 학파가 실제로 떠맡은 전제에 따라 달라지며, ‘모든 학파에 동일한 효력’은 도출되지 않는다. ㄹ. 옳다. 첫 번째 근거의 핵심은 ‘분석해도 환원되지 않음’이라는 기준이 ‘부분이나 다른 법에 의존하지 않음’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셋째 문단은 이 근거의 적용 여부가 ‘궁극성을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ㄹ은 상좌부가 바로 그 방식으로 궁극성을 규정하는 경우를 가정하므로, 그 조건 아래에서 첫 번째 근거는 적용될 수 있다. 조건문의 전건이 글이 열어 둔 변수를 정확히 채우고 있다는 점을 읽어 내는 것이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