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odghāta
‘공’이라는 말의 무게
모든 것은 공(空)하다는 말을, 불교를 조금이라도 가까이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한국의 절에서 법회가 열릴 때마다 대중이 함께 외는 『반야심경』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구절로 널리 알려져 있고, 그 울림은 불교를 믿지 않는 이들의 귀에도 익숙하다. 그런데 막상 ‘공하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대답은 금세 흐릿해진다. 어떤 이는 세상 모든 것이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허무의 선언으로 듣고, 어떤 이는 현상 너머 어딘가에 있는 텅 비고 신비로운 절대의 경지를 가리키는 말로 듣는다. 또 어떤 이는 그저 깊어 보이도록 꾸민 말장난이라고 여긴다. 이 세 가지 반응은 모두 자연스럽지만, 이 연재가 차근차근 보여 주겠듯 셋 모두 과녁을 빗나간다.
중관학(中觀學)은 바로 이 ‘공’이라는 말을 인류 지성사에서 가장 엄밀하고 가장 끈질기게 사유한 철학 전통이다. 2세기 무렵 남인도의 사상가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에게서 비롯된 이 사유는 이후 인도 대승불교의 양대 학파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고, 티베트로 건너가서는 불교 철학 전체의 정점으로 떠받들어졌으며, 중국으로 건너가서는 삼론종(三論宗)을 이루고 천태와 화엄과 선종의 사유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한반도와의 인연도 가볍지 않다. 5세기 말 고구려 출신의 승랑(僧朗)은 중국 강남의 섭산(攝山)에 머물며 삼론학을 새롭게 일으켜, 이른바 ‘신삼론(新三論)’의 문을 연 인물로 평가받는다. 동아시아 불교를 이해하려는 사람에게 중관학은 결코 우회할 수 없는 관문인 셈이다.
그러나 중관학은 악명 높을 만큼 어렵다. 나가르주나의 문장은 짧고 단단하며, 그 짧은 게송 하나하나가 긴 논쟁의 역사를 압축하고 있다. “가는 자는 가지 않는다”라거나 “열반과 윤회 사이에는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다” 같은 구절을 처음 만나는 독자는 당혹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당혹감은 결코 독자의 부족함 탓이 아니다. 중관학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 온 사고의 습관, 곧 사물은 저마다 고정된 본성을 지닌 채 그 자리에 있으며 우리의 말은 그 본성을 있는 그대로 가리킨다는 믿음을 정면으로 흔들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것은 특정한 의견이 아니라 의견을 만들어 내는 바탕 자체이고, 그래서 처음에는 발밑이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 연재의 목표는 결론을 외우게 하는 데 있지 않고 논증을 따라 함께 걷는 데 있다. 중관학은 ‘무엇을 믿으라’고 가르치기보다 ‘어떻게 보라’고 가르친다. 나가르주나 스스로 “나에게는 세우는 주장이 없다”고 말했을 만큼, 중관학의 핵심은 교설의 목록이 아니라 하나의 사유 방식에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움켜쥐는 바로 그 순간, 그 움켜쥠이 어떤 숨은 전제에 기대고 있는지를 끝까지 따져 묻는 태도 말이다. 그러므로 이 첫 편에서는 성급하게 논증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기보다 문 앞에 서서 이 집의 구조부터 살펴보려 한다. 중관이라는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가르주나는 누구였는가, 그는 불교사의 어떤 지점에서 누구와 대결했는가, 그리고 ‘공’이라는 말은 정확히 무엇을 부정하고 무엇을 부정하지 않는가.
산스크리트 용어는 국제 표준 로마자 표기(IAST)를 기울임꼴로 병기하고, 빠알리 용어는 필요할 때 따로 밝힌다. 게송은 데바나가리 원문, 로마자 전사, 구마라집의 한역, 그리고 우리말 풀이를 함께 싣는다. 원문을 읽지 못해도 괜찮다. 소리와 모양을 눈에 익혀 두면, 같은 낱말이 다른 게송에서 다시 나타날 때 반가운 얼굴처럼 알아보게 될 것이다. 『중론』의 게송 번호는 ‘품.게’ 형식으로 적는다. 예컨대 24.18은 제24품 제18게를 뜻한다.
Nāmārtha
이름 풀이: 가운데를 본다는 것
‘중관’의 산스크리트 원어 Madhyamaka는 ‘가운데’를 뜻하는 madhya에서 나왔다. 이 낱말은 라틴어 medius, 영어 middle과 같은 인도유럽어의 뿌리를 공유한다. madhya에 최상급 접미사가 붙은 madhyama는 ‘가장 가운데의’, 곧 ‘중간의’라는 뜻이고, 여기에 다시 ‘~에 관한, ~에 속하는’을 뜻하는 접미사 -ka가 붙으면 madhyamaka, 즉 ‘가운데에 관한 것’이 된다. 이 말은 나가르주나의 주저 『물라마드야마까까리까(Mūlamadhyamakakārikā)』, 풀어 말해 ‘가운데에 관한 근본 게송’이라는 제목 속에 들어 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마드야미까(Mādhyamika), 곧 중관파라고 부른다.
한자 이름 ‘중관(中觀)’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이 책을 『중론(中論)』으로 옮기고 각 품의 이름을 「관인연품(觀因緣品)」, 「관거래품(觀去來品)」처럼 ‘관(觀)’ 자로 시작하게 한 데서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여기서 ‘관’은 무엇인가를 곰곰이 살피고 검토한다는 뜻으로, 산스크리트 품명의 parīkṣā(고찰, 검토)에 해당한다. 그러니 ‘중관’이라는 이름은 ‘가운데의 관점’이기도 하고 ‘가운데를 살펴봄’이기도 하다. 두 풀이 모두 이 전통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중관학은 어떤 대상을 제시하기보다 대상을 살펴보는 방식을 제시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 산스크리트 | 한역 | 우리말 | 가리키는 것 |
|---|---|---|---|
| Madhyamaka | 中觀 | 중관, 중관학 | 나가르주나에게서 비롯한 가르침과 그 학파 전체 |
| Mādhyamika | 中觀派 | 중관파, 중관론자 |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또는 학파 |
| Mūlamadhyamakakārikā | 中論(頌) | 중론, 중론송 | 나가르주나의 주저. 27품 약 450수의 게송 |
| madhyamā pratipad | 中道 | 중도 | 두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길. 빠알리어로는 majjhimā paṭipadā |
무엇과 무엇의 ‘가운데’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가운데’란 무엇과 무엇 사이의 가운데일까. 불교 전통에서 중도라는 말은 적어도 두 층위에서 쓰여 왔다. 첫째는 붓다의 첫 설법, 이른바 초전법륜에 나오는 실천의 중도다. 붓다는 다섯 수행자에게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삶과 스스로를 괴롭히는 고행이라는 두 극단을 모두 버리고 팔정도라는 가운데 길을 걸으라고 가르쳤다. 둘째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볼 『깟짜나곳따 경』에 나오는 이해의 중도다. 여기서 붓다는 세상 사람들이 대개 ‘있다’와 ‘없다’라는 두 극단에 기대어 있지만, 여래는 그 둘에 다가가지 않고 가운데에 의해 법을 설한다고 말한다. 중관학이 계승하고 극한까지 밀고 나간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중도다.
여기서 반드시 짚어 두어야 할 점이 있다. 중관의 ‘가운데’는 두 극단 사이의 적당한 절충점이나 산술적인 중간값이 아니다. 어떤 것이 ‘반쯤 있고 반쯤 없다’는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도 철학자들이 즐겨 쓰던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누군가 “석녀(石女), 곧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의 아들은 키가 큰가, 작은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크다’고 답해도 틀리고 ‘작다’고 답해도 틀리며, ‘보통이다’라는 중간의 답도 틀린다. 질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이미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응답은 세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질문이 기대고 있는 전제를 드러내는 것이다. 중관학이 ‘있다’와 ‘없다’를 모두 물리칠 때 하는 일도 이와 닮았다. 나가르주나가 보기에 ‘있다’와 ‘없다’라는 양자택일은 둘 다 ‘스스로 존재하는 무엇’, 곧 뒤에서 살펴볼 자성(自性)을 몰래 전제하고 있다. 그 전제를 걷어 내면 두 극단은 동시에 힘을 잃는다. 그 자리에 드러나는 것이 가운데 길이다.
Ācārya-carita
나가르주나, 전설과 역사 사이
나가르주나라는 이름은 ‘뱀’ 또는 ‘용’을 뜻하는 nāga와 ‘희고 빛나는’을 뜻하며 나무 이름이기도 한 arjuna가 합쳐진 것이다. 구마라집이 전하는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은 이 이름을 두고, 그의 어머니가 아르주나 나무 아래에서 그를 낳았고 그가 용(nāga)의 인연으로 도를 이루었기에 ‘용수(龍樹)’라 불렀다고 풀이한다. 티베트 전통에서는 ‘용이 이룬 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옮겼고, 한역 전통에서도 용맹(龍猛)이라는 이름이 함께 쓰였다.
그의 생애를 둘러싼 전승은 극적이다. 『용수보살전』에 따르면 그는 남인도의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베다와 온갖 학문에 통달했다. 젊은 시절 그는 뜻이 맞는 벗 셋과 함께 몸을 숨기는 술법을 익혀 왕궁을 몰래 드나들었는데, 이 일이 발각되어 벗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그 혼자만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이때 그는 욕망이야말로 괴로움의 뿌리임을 뼈저리게 깨닫고 출가했다고 한다. 출가한 뒤에는 90일 만에 삼장을 두루 읽어 치웠고,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아 헤매던 중에 대룡보살(大龍菩薩)이 그를 바다 밑 용궁으로 데려가 깊은 대승 경전들을 보여 주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용궁 전설은 반야경 계통의 경전들이 나가르주나를 통해 세상에 널리 드러났다는 믿음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티베트의 전승은 한술 더 떠서 그가 600년을 살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역사학의 눈으로 보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오늘날 학자들은 대체로 나가르주나가 150년에서 250년 사이 무렵에 활동했으며, 남인도의 데칸 지역을 다스리던 사타바하나(Sātavāhana) 왕조와 인연이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가 어느 왕에게 보낸 교훈시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과 벗인 왕에게 부친 서간 『권계왕송(勸誡王頌)』이 그 근거가 된다. 후대 전승은 그를 끄리슈나 강 유역의 슈리빠르바따(Śrīparvata)와 연결 짓기도 한다. 한편 밀교 문헌의 저자, 연금술과 의학에 능한 성자로서의 나가르주나도 전해지는데, 학자들은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같은 이름을 쓴 후대의 다른 인물이거나 명성에 기대어 이름이 덧붙은 경우라고 본다. 이름이 크면 이름에 기대는 글도 많아지는 법이다.
그렇다면 ‘철학자 나가르주나’의 저작으로 비교적 확실하게 인정받는 것은 무엇일까. 티베트 전통은 논리적 논증을 담은 여섯 저작을 묶어 ‘이취육론(理聚六論)’이라 불러 왔고, 현대 학계도 대체로 이 목록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재구성한다. 한역 전통에서 그의 저작으로 전해지는 『대지도론(大智度論)』과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은 동아시아 불교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저자 문제를 두고는 오랫동안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 저작 | 산스크리트 제목 | 성격과 핵심 |
|---|---|---|
| 『중론송』 | Mūlamadhyamakakārikā | 27품 약 450수의 게송. 인과, 운동, 자아, 시간, 열반 등 모든 범주를 검토하는 중관 사상의 뿌리 |
| 『회쟁론』 | Vigrahavyāvartanī | “모든 것이 공하다면 그대의 말도 공하지 않은가”라는 논적의 반론에 답하는 논쟁서. ‘나에게는 주장이 없다’는 선언이 여기 나온다 |
| 『육십송여리론』 | Yuktiṣaṣṭikā | 60수의 게송. 집착의 극복과 윤회·열반의 문제를 다룬다 |
| 『공칠십론』 | Śūnyatāsaptati | 약 70수의 게송. 『중론』의 논증을 보충하며 공을 다시 논증한다 |
| 『광파론』 | Vaidalyaprakaraṇa | 니야야 학파가 세운 인식과 논증의 범주들을 하나하나 논파한다 |
| 『보행왕정론』 | Ratnāvalī | 왕에게 보낸 교훈시. 윤리와 통치, 공덕과 지혜의 길, 대승의 정당성을 이야기한다 |
『중론』 자체에는 ‘대승’이라는 말이 뚜렷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은 오온, 십팔계, 사성제, 십이연기처럼 당시 모든 불교 부파가 공유하던 어휘를 쓰며, 부파의 학승들을 대화 상대로 삼는다. 나가르주나가 대승을 드러내 놓고 옹호하는 모습은 『보행왕정론』 같은 저작에서 보인다. 『중론』이 대승의 울타리를 넘어 불교 철학 전체의 공용 문헌처럼 읽혀 온 까닭이 여기에 있다.
Itihāsa
불교사 지도 위의 중관
어떤 철학이든 그것이 무엇에 맞서 나왔는지를 알면 절반은 이해한 셈이다. 나가르주나가 맞선 상대를 이해하려면 붓다의 입멸 이후 수백 년 동안 불교 안에서 벌어진 거대한 지적 작업, 곧 아비달마(Abhidharma, 빠알리어 Abhidhamma)를 먼저 떠올려야 한다. 아비달마는 ‘법(dharma)에 대한 탐구’라는 뜻으로, 경전 곳곳에 흩어진 붓다의 가르침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분류하여 하나의 체계로 세우려는 시도였다.
아비달마 논사들이 한 일을 비유하자면 경험 세계 전체를 화학 원소표처럼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 ‘책상’이나 ‘숲’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 작은 구성 요소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 구성 요소들을 끝까지 쪼개어 들어가면 더는 쪼갤 수 없는 궁극의 요소들에 이르는데, 이것을 법(dharma)이라 불렀다. 색깔과 소리 같은 물질적 요소, 느낌과 생각과 의도 같은 정신적 요소들이 저마다 고유한 특징을 가진 채 찰나찰나 생멸하며 세계를 이룬다. 이 관점에서 ‘사람’이나 ‘수레’는 법들의 모임에 붙인 이름에 불과한 가명(假名)이지만, 법 자체는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다. 이 구도는 자아를 부정하는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탄탄하게 뒷받침했다. 사람을 이루는 요소들 어디에서도 영원한 자아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북인도에서 가장 큰 세력을 이룬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는 그 이름처럼 ‘모든 것이 있다’고 주장했다. 법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시간대에 걸쳐 실재하며, 각각의 법은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기 고유의 본성, 곧 자성(自性, svabhāva)을 지닌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빠알리 전통의 주석 문헌에도 “자기 고유의 성질을 지니기 때문에 법이라 한다”는 취지의 정의가 보인다. 다만 이때의 ‘고유한 성질’이 설일체유부의 자성과 같은 무게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리며, 이 문제는 다음 편에서 자세히 다룬다.
한편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새로운 경전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혜의 완성’을 뜻하는 반야바라밀(prajñāpāramitā)을 주제로 한 반야경들이다. 가장 이른 층으로 꼽히는 『팔천송반야경』은 놀라운 선언을 되풀이한다. 사람만이 아니라 법들 또한 공하다는 것이다. 아비달마가 사람을 해체하고 법에서 멈추었다면, 반야경은 그 법들마저 붙잡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전은 선언할 뿐 논증하지는 않는다. 나가르주나의 역사적 역할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는 반야경의 직관을 엄밀한 논증의 언어로 옮겨, 아비달마 논사들이 스스로 받아들이는 전제로부터 자성이라는 개념이 결국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했다.
Maṅgala-śloka
귀경게와 여덟 가지 부정
『중론』은 붓다께 올리는 짧은 예경의 게송, 곧 귀경게(歸敬偈)로 시작한다. 인도 고전에서 책 첫머리의 예경은 흔한 관례이지만, 나가르주나의 귀경게는 단순한 의례를 넘어 책 전체의 주제를 두 줄 반 안에 압축해 놓은 설계도에 가깝다. 이 게송을 천천히 읽어 보자.
अनेकार्थमनानार्थमनागममनिर्गमम् ॥
यः प्रतीत्यसमुत्पादं प्रपञ्चोपशमं शिवम् ।
देशयामास सम्बुद्धस्तं वन्दे वदतां वरम् ॥ anirodham anutpādam anucchedam aśāśvatam |
anekārtham anānārtham anāgamam anirgamam ||
yaḥ pratītyasamutpādaṃ prapañcopaśamaṃ śivam |
deśayāmāsa saṃbuddhas taṃ vande vadatāṃ varam ||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能說是因緣 善滅諸戲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소멸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으며, 끊어지지도 않고 항상하지도 않으며,
하나인 것도 아니고 여럿인 것도 아니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온갖 희론이 고요히 가라앉은 상서로운 연기(緣起)를 가르치신
원만히 깨달으신 분, 설법하는 이들 가운데 으뜸이신 그분께 예경합니다.
게송의 앞 두 줄에는 여덟 개의 부정어가 나란히 놓여 있다. 이것을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팔불(八不)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 여덟 부정은 무엇을 꾸미고 있을까. 문법적으로 보면 이 여덟 형용어는 모두 셋째 줄의 ‘연기(pratītyasamutpāda)’에 걸린다. 다시 말해 팔불은 세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하는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를 묘사하는 것이다. 연기하는 것은 자성을 지닌 무엇이 새로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방식으로 있지 않고, 영원히 지속하거나 완전히 끊어지는 방식으로도 있지 않으며, 원인과 결과가 완전히 같은 하나이거나 완전히 다른 둘인 방식으로도 있지 않고, 어딘가에서 와서 어딘가로 가는 방식으로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덟 부정은 네 쌍의 대립을 이룬다. 생겨남과 소멸, 항상함과 끊어짐, 같음과 다름, 옴과 감이다. 이 네 쌍은 우리가 사물과 사건을 생각할 때 거의 반사적으로 동원하는 가장 기본적인 틀이다. 무엇인가를 보면 우리는 그것이 언제 생겨났고 언제 사라질지, 계속 남을지 끊어질지, 다른 것과 같은지 다른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지를 묻는다. 나가르주나는 이 틀들 하나하나가 그 대상을 스스로 존재하는 무엇으로 상정할 때에만 온전히 작동한다는 것을, 『중론』의 각 품에서 차례로 보여 줄 것이다. 예컨대 제1품은 생겨남을, 제2품은 옴과 감을 정면으로 다룬다.
세심한 독자라면 눈치챘겠지만, 산스크리트 원문은 ‘소멸하지 않음(anirodha)’으로 시작하는 반면 구마라집의 한역은 ‘생겨나지 않음(不生)’으로 시작한다. 한시의 운율과 자연스러운 생각의 순서를 따른 번역으로 보이는데, 동아시아에서는 이 한역의 순서가 워낙 익숙해져 ‘불생불멸(不生不滅)’이 하나의 관용구처럼 굳어졌다. 『반야심경』의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도 같은 사유의 가족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게송의 셋째 줄에 등장하는 두 낱말을 기억해 두자. 연기는 ‘희론이 고요히 가라앉은 것(prapañcopaśama)’이자 ‘상서로운 것(śiva)’이다. 희론이 무엇인지는 다음 절에서 살피겠지만, 여기서 이미 중관학의 목표가 무엇인지가 드러난다. 중관학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하나 더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이론을 끝없이 증식시키는 마음의 움직임을 가라앉히려 한다. 그리고 그 가라앉음을 ‘상서롭다’, 곧 평화롭고 복된 것이라 부른다. 중관학이 차가운 논리의 학문이면서 동시에 해탈을 향한 수행의 길인 까닭이 이 한 줄에 담겨 있다.
Mūla-padāni
네 개의 열쇠말
중관학의 문을 여는 열쇠는 네 개다. 자성, 공, 연기, 희론. 이 네 낱말의 관계만 제대로 붙잡아도 『중론』의 절반은 길을 잃지 않고 읽을 수 있다. 먼저 한눈에 살펴본 뒤 하나씩 풀어 보자.
스스로(sva) 있는 존재(bhāva).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변하지 않는 고유한 본성. 중관학이 부정하는 바로 그것이다.
‘비어 있음’. 무엇이 비어 있는가? 자성이 비어 있다. 공은 ‘없음’이 아니라 ‘자성의 없음’이다.
‘의존하여(pratītya) 함께 일어남(samutpāda)’. 조건에 기대어 생겨나는 것. 중관학은 연기와 공을 같은 사태의 두 이름으로 본다.
개념과 언어가 끝없이 번져 나가며 대상을 실체화하는 마음의 움직임. 공을 깨닫는다는 것은 이 증식이 가라앉는 것이다.
자성: 중관학의 과녁
공을 이해하려면 역설적으로 공이 부정하는 것, 곧 자성부터 정확히 알아야 한다. 과녁을 모르고서는 화살이 어디를 겨누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가르주나는 『중론』 제15품 「관유무품(觀有無品)」에서 자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 정의에는 두 개의 조건이 들어 있다. 첫째, 자성은 만들어지지 않은 것(akṛtrima)이다. 원인과 조건에 의해 빚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원인과 조건의 산물일 뿐 ‘스스로의 본성’이라 할 수 없다. 둘째, 자성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nirapekṣa)이다. 무엇인가에 기대어서만 성립한다면 그 성질은 그것 자체의 것이 아니라 관계의 것이다. 예를 들어 ‘길다’는 성질을 생각해 보자. 한 자짜리 막대는 반 자짜리 막대 옆에서는 길지만 두 자짜리 막대 옆에서는 짧다. 길다는 것은 비교 대상에 의존하므로 막대의 자성이 아니다.
이 정의를 받아들이면 곧바로 무거운 귀결이 따라 나온다. 만약 무엇인가가 자성을 가진다면, 그것은 원인과 조건 없이도 이미 그러해야 하고 어떤 조건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새로 생겨날 수도, 소멸할 수도, 다른 것과 작용을 주고받을 수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온통 생겨나고 사라지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경험 세계의 어떤 것도 자성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이 나가르주나 논증의 가장 기본적인 골격이다. 그는 “자성이 없으니 세계가 무너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자성이 있다면 이 변화하는 세계가 설명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공: 무엇이 비어 있는가
공(śūnyatā)은 형용사 śūnya(비어 있는)에 추상명사를 만드는 접미사 -tā가 붙은 말로, ‘비어 있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반드시 붙잡아야 할 문법적 사실이 하나 있다. ‘비어 있다’는 말은 언제나 ‘무엇이’ 비어 있는지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 항아리는 비어 있다”는 말은 항아리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항아리에 물이 없다는 뜻이다. 빈 항아리는 여전히 거기 있고, 오히려 비어 있기에 물을 담을 수 있다.
초기경전에도 이런 용법이 뚜렷하다. 『맛지마 니까야』의 「공에 대한 짧은 경(Cūḷasuññata-sutta, MN 121)」에서 붓다는, 지금 머물고 있는 녹자모 강당이 코끼리와 소와 말이 비어 있고 금과 은이 비어 있고 남녀의 무리가 비어 있지만 비구 승가만큼은 비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무엇이 없는 자리를 없는 대로 보고 남아 있는 것을 남아 있는 대로 보는 것이 공에 올바로 들어가는 방식이라고 가르친다. 중관학의 공도 이 문법을 따른다. 사물이 비어 있다는 것은 사물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자성이 비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공을 만날 때마다 “무엇이 비어 있는가?”라고 되물어 보라. 이 짧은 습관 하나가 공에 대한 오해의 대부분을 막아 준다.
산스크리트어 śūnya는 인도 수학에서 숫자 0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7세기 수학자 브라마굽따는 0을 하나의 수로 다루는 연산 규칙을 정리했는데, 이 인도의 0이 아랍 세계를 거쳐 유럽에 전해지며 오늘날의 자릿값 체계가 완성되었다. 0은 ‘아무것도 아님’이면서 동시에 자리를 지키며 다른 수들이 의미를 갖게 해 준다. 102에서 0이 빠지면 12가 되어 버린다. 불교의 공과 수학의 0이 직접 어떤 영향 관계에 있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비어 있음이 오히려 작용을 가능하게 한다’는 발상이 같은 낱말에 담겨 있다는 점은 음미해 볼 만하다.
연기: 공의 다른 이름
연기(pratītyasamutpāda)는 붓다의 깨달음의 핵심으로, 모든 것이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고 조건이 사라지면 사라진다는 가르침이다. 초기경전의 짧은 정식은 이렇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함으로써 저것이 소멸한다.” 중관학의 결정적 통찰은 이 연기와 공을 하나로 묶는 데 있다. 앞에서 보았듯 자성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연기하는 것은 정의상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연기하는 것은 곧 자성이 없는 것, 즉 공한 것이다. 공은 연기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연기를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이 등식은 제3편에서 『중론』 24.18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다룬다.
희론: 가라앉혀야 할 것
희론(prapañca, 빠알리어 papañca)은 번역하기 까다로운 말이다. 어원적으로는 ‘펼쳐짐, 확장, 다양화’를 뜻하는데, 불교에서는 개념과 언어가 마음속에서 끝없이 증식하며 대상을 고정된 실체로 굳혀 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한역의 ‘희론(戲論)’은 ‘부질없는 말놀음’이라는 뜻이지만, 그저 쓸데없는 잡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내 것’, ‘이것’과 ‘저것’, ‘있다’와 ‘없다’를 쉼 없이 만들어 내며 그 만들어 낸 것에 스스로 붙잡히는 마음의 근본적인 움직임이다. 이 움직임이 사물에 자성을 덧씌우고, 덧씌운 자성에 집착하게 만든다. 공을 깨닫는다는 것은 새로운 개념을 하나 더 얻는 것이 아니라 이 증식이 가라앉는 것이다. 귀경게가 연기를 ‘희론이 고요해진 것’이라 부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
Āgama-mūla
초기경전 속의 뿌리
중관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것이 붓다의 원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후대 대승의 독창적 사변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에는 일리가 있지만 전부는 아니다. 나가르주나 자신은 자신이 새로운 것을 말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붓다의 가르침에 이미 들어 있던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갔을 뿐이라고 보았다. 그 증거가 『중론』 제15품 제7게다. 약 450수에 이르는 『중론』 전체에서 나가르주나가 경전의 이름을 들어 직접 언급하는 곳은 사실상 이곳뿐인데, 그가 고른 것은 대승 경전이 아니라 초기경전이었다.
प्रतिषिद्धं भगवता भावाभावविभाविना ॥ kātyāyanāvavāde cāstīti nāstīti cobhayam |
pratiṣiddhaṃ bhagavatā bhāvābhāvavibhāvinā || 佛能滅有無 如化迦旃延
經中之所說 離有亦離無 있음과 없음을 꿰뚫어 아시는 세존께서는 『깟짜야나에게 주신 가르침』에서
‘있다’와 ‘없다’ 둘 모두를 물리치셨다.
여기서 언급되는 경전은 빠알리 『상윳따 니까야』에 전하는 『깟짜나곳따 경(Kaccānagotta-sutta, SN 12.15)』이며, 한역 『잡아함경』에도 그 대응 경전이 있다. 이 경에서 깟짜나곳따 비구는 붓다에게 ‘바른 견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 붓다는 세상 사람들이 대개 ‘있음’과 ‘없음’이라는 두 가지에 기대고 있다고 말한 뒤, 세상의 생겨남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이에게는 세상에 대해 ‘없다’는 견해가 일어나지 않고,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이에게는 ‘있다’는 견해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설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Sabbaṃ natthī’ti ayaṃ dutiyo anto.
Ete te, kaccāna,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 깟짜나여, ‘모든 것은 있다’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없다’는 것은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나여, 여래는 이 두 극단에 다가가지 않고 가운데에 의해 법을 설한다.
그리고 붓다가 ‘가운데에 의해’ 설하는 법이란 다름 아닌 십이연기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있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으며, 그렇게 이어져 괴로움의 온 덩어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경의 구조는 중관학의 구조와 놀랍도록 닮았다. ‘있다’와 ‘없다’라는 두 극단이 물리쳐지고, 그 자리에 연기가 놓인다. 나가르주나가 굳이 이 경을 골라 인용한 것은 자신이 말하는 공과 중도가 바로 이 가르침의 연장선 위에 있음을 분명히 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경에서 ‘모든 것은 있다(sabbaṃ atthi)’는 극단으로 불린 표현은, 설일체유부(‘모든 것이 있다고 말하는 학파’)라는 이름과 울림이 겹친다. 나가르주나의 독자들이 이 아이러니를 놓쳤을 리 없다.
공이라는 말 자체도 초기경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상윳따 니까야』의 「공한 세상 경(Suñña-sutta, SN 35.85)」에서 아난다 존자가 “세상은 공하다고들 하는데, 어떤 뜻에서 그렇게 말합니까?”라고 묻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tasmā suñño loko’ti vuccati. 아난다여,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이 비어 있기 때문에
‘세상은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비어 있다’는 문법은 정확하다. 세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자아와 자아에 속한 것이 비어 있다는 것이다. 초기불교와 아비달마가 공을 주로 ‘사람에게 자아가 없음’의 의미로 이해했다면, 반야경과 나가르주나는 그 공을 ‘법들에게도 자성이 없음’으로 넓혔다. 이 확장이 정당한가를 두고 전통들 사이의 논쟁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상좌부 전통의 관점에서 보면 궁극적 법(paramattha dhamma)까지 해체하는 것은 붓다의 분석을 넘어서는 일로 보일 수 있고, 중관의 관점에서 보면 법에서 멈추는 것이야말로 분석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은 것이다. 이 연재는 중관학의 입문서이므로 중관의 논리를 충실히 따라가겠지만, 이 논쟁이 여전히 살아 있는 물음이라는 점은 기억해 두자. 다음 절의 수레 비유가 이 논쟁의 한가운데로 우리를 데려간다.
Ratha-vicāra
수레는 어디에 있는가
불교 전통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비유 가운데 하나가 수레의 비유다. 『상윳따 니까야』의 「와지라 경(Vajirā-sutta, SN 5.10)」에서 와지라 비구니는 마라가 “이 중생은 누가 만들었는가, 중생은 어디서 생겨나는가”라고 흔들어 대자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한다.
evaṃ khandhesu santesu, hoti sattoti sammuti. 부품들이 모였을 때 ‘수레’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오온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관습적 명칭이 있다.
후대의 『밀린다왕문경』은 이 비유를 극적인 대화로 펼친다. 나가세나 존자는 수레를 타고 온 밀린다 왕에게 묻는다. 끌채가 수레입니까? 아니다. 굴대가 수레입니까? 아니다. 바퀴가 수레입니까? 차체가, 멍에가, 채찍이 수레입니까? 모두 아니다. 그렇다면 이 부품들을 모두 합친 것이 수레입니까?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부품들과 따로 떨어진 어딘가에 수레가 있습니까?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대왕이시여, 수레는 어디에 있습니까? 왕은 결국 수레라는 것이 이 부품들에 의존하여 붙은 이름이자 관습적 명칭임을 인정한다. 나가세나라는 이름도 마찬가지로, 머리카락과 몸과 느낌과 의식에 의존하여 붙은 명칭일 뿐 그 안이나 밖 어디에도 독립된 ‘나가세나’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 비유는 모든 불교 전통이 공유한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중관과 아비달마가 갈라진다. 아비달마의 관점에서 수레의 분석은 어딘가에서 멈춘다. 수레는 바퀴와 굴대로, 바퀴는 테와 살로, 그것들은 다시 더 작은 요소들로 쪼개지지만, 결국 색깔이나 단단함 같은 더는 쪼갤 수 없는 궁극의 법들에 이르면 분석은 끝나고 그 법들은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이렇게 사람에게 자아가 없음을 밝히는 것을 인무아(人無我, pudgala-nairātmya)라 한다.
중관은 이 멈춤을 문제 삼는다. 수레가 부품들에 의존하기에 자성이 없다면, 똑같은 논리로 부품들 역시 그 부분들과 조건들에 의존하므로 자성이 없다. 궁극의 법이라 불리는 것들도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찰나적으로 생멸하므로, 앞에서 본 자성의 정의, 곧 ‘만들어지지 않고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분석은 어떤 특권적인 층위에서도 멈출 이유가 없다. 이렇게 법에도 자성이 없음을 밝히는 것을 법무아(法無我, dharma-nairātmya)라 한다. 수레의 비유는 인무아를 가르치는 비유였지만, 나가르주나의 손에서 그것은 법무아로 가는 길이 된다.
그렇다면 분석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이것이 중관 이해의 가장 중요한 고비다. 수레의 자성을 찾을 수 없다고 해서 우리가 수레를 탈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수레는 여전히 짐을 싣고 길을 달린다. 다만 그것은 부품들과 조건들에 기대어 ‘수레’라고 불리며 작용하는 방식으로 있을 뿐, 그 모든 관계에서 떨어져 홀로 서 있는 ‘수레 자체’로 있지 않다. 나가르주나는 이렇게 의존하여 이름 붙여진 것을 가명(假名) 또는 시설(施設, prajñapti)이라 부른다. 가명은 ‘가짜 이름’이 아니라 ‘기대어 세운 이름’이다. 그리고 세계 전체가 이런 방식으로 있다는 것, 그것이 공이다.
강물을 떠올려 보자. 한강의 물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흘러가 바다로 빠져나가고 새로운 물이 끊임없이 흘러든다. 10년 전의 한강과 오늘의 한강에는 같은 물 분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강’은 무엇인가? 물 분자들의 합인가, 강바닥의 모양인가, 흐름의 패턴인가, 아니면 그 모든 것에 붙인 이름인가? 그리고 이렇게 물었을 때, 한강이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옳은가? 우리가 여전히 한강에서 배를 띄우고 물을 긷는다는 사실은 이 물음에 어떤 실마리를 주는가?
Mithyā-grāha
공에 대한 네 가지 오해
나가르주나는 자신의 가르침이 오해받을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중론』 제24품에서 그는 공이 잘못 붙잡혔을 때 얼마나 위험한지를 강렬한 비유로 경고한다.
सर्पो यथा दुर्गृहीतो विद्या वा दुष्प्रसाधिता ॥ vināśayati durdṛṣṭā śūnyatā mandamedhasam |
sarpo yathā durgṛhīto vidyā vā duṣprasādhitā || 不能正觀空 鈍根則自害
如不善咒術 不善捉毒蛇 잘못 이해된 공은 지혜가 무딘 자를 파멸시킨다.
잘못 붙잡은 뱀이나 잘못 부린 주술이 그러하듯이.
독사는 목덜미를 정확히 잡으면 해독제의 원료가 되지만 꼬리를 잡으면 잡은 사람을 문다. 공도 그렇다. 올바로 이해하면 집착을 풀어 주는 약이 되지만, 잘못 이해하면 오히려 사람을 해친다.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온 대표적인 오해를 네 가지로 정리해 보자.
| 오해 | 그렇게 보는 이유 | 중관학의 바른 이해 |
|---|---|---|
| 허무론 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 ‘비어 있다’를 ‘존재하지 않는다’로 곧바로 읽는다. | 공이 부정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자성이다. 빈 항아리는 여전히 항아리이며, 비어 있기에 오히려 물을 담는다. |
| 절대 실재론 공은 현상 너머의 궁극적 실체다 | 모든 것을 부정한 끝에 무언가 신비한 바탕이 남으리라 기대한다. | 공은 사물들 뒤에 숨은 또 하나의 사물이 아니다. 공 역시 공하며, 공을 실체화하는 순간 새로운 자성을 세우게 된다. |
| 도덕 무용론 모든 것이 공하니 선악도 의미 없다 | 자성이 없으면 업과 과보도 설 자리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 나가르주나는 거꾸로 말한다. 자성이 있다면 변화가 불가능하므로 업도 과보도 수행도 성립하지 않는다. 공하기에 모든 것이 성립한다. |
| 교조화 공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 최종 이론이다 | 공을 다른 견해들을 대체하는 더 우월한 견해로 붙잡는다. | 공은 모든 견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약이다. 공을 또 하나의 견해로 움켜쥐는 사람은 치유하기 어렵다. |
세 번째 오해에 대한 나가르주나의 응답은 특히 중요하다. 제24품의 논적은 이렇게 따진다. 모든 것이 공하다면 생겨남도 소멸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괴로움의 생겨남과 소멸을 말하는 사성제도, 깨달음을 얻는 이도, 불법승 삼보도 모두 무너지지 않겠는가. 나가르주나는 이 비판을 그대로 뒤집어 돌려준다.
सर्वं न युज्यते तस्य शून्यं यस्य न युज्यते ॥ sarvaṃ ca yujyate tasya śūnyatā yasya yujyate |
sarvaṃ na yujyate tasya śūnyaṃ yasya na yujyate || 以有空義故 一切法得成
若無空義者 一切則不成 공이 성립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성립하고,
공이 성립하지 않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
이 게송은 중관학의 가장 대담한 역전이다. 논적은 자성이 있어야 사물이 확고하게 존재하고 작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가르주나가 보기에 자성을 가진 것은 만들어지지 않고 의존하지 않으므로 결코 변할 수 없다. 변할 수 없다면 괴로움은 소멸할 수 없고, 무지한 중생은 영원히 무지한 채로 남으며, 수행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반대로 모든 것이 공하기에, 곧 조건에 의존하기에 괴로움은 조건이 사라지면 사라질 수 있고 사람은 수행을 통해 변할 수 있다. 공은 불교의 실천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다.
네 번째 오해에 대해서는 제13품의 게송이 답한다.
येषां तु शून्यतादृष्टिस्तानसाध्यान् बभाषिरे ॥ śūnyatā sarvadṛṣṭīnāṃ proktā niḥsaraṇaṃ jinaiḥ |
yeṣāṃ tu śūnyatādṛṣṭis tān asādhyān babhāṣire || 大聖說空法 為離諸見故
若復見有空 諸佛所不化 승리자들께서는 공을 모든 견해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 말씀하셨다.
그러나 공을 견해로 삼는 이들은 구제할 수 없다고 하셨다.
후대의 주석가 월칭은 이것을 약의 비유로 풀었다. 설사약은 뱃속의 병균을 몰아낸 뒤 자기 자신도 함께 배출되어야 한다. 약이 몸속에 남아 버리면 그것이 새로운 병이 된다. 공도 마찬가지다. 공은 자성에 대한 집착을 씻어 내는 약이지만, 공을 새로운 붙잡을 거리로 삼으면 그것은 가장 고치기 어려운 병이 된다. 중관학이 끊임없이 ‘공도 공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이 주제는 제10편에서 『회쟁론』과 함께 깊이 다룬다.
Grantha-sūcī
『중론』 스물일곱 품의 지도
이 연재는 『중론』을 첫 품부터 순서대로 주석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입문자에게는 논증의 도구와 핵심 개념을 먼저 익힌 뒤, 중요한 품들을 골라 깊이 읽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체 지형을 한 번 조망해 두면 앞으로 어느 품을 읽든 그것이 책 전체의 어디에 자리하는지 알 수 있다. 아래 지도는 스물일곱 품을 주제에 따라 다섯 무리로 나누어 본 것이다. 이 구분은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며, 여기서는 입문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느슨한 분류임을 밝혀 둔다. 붉은 표식은 이 연재에서 그 품을 중심적으로 다룰 편을 가리킨다.
지도를 훑어보면 『중론』이 얼마나 넓은 범위를 다루는지 실감할 수 있다. 앞부분은 인과와 운동, 감각기관과 오온 같은 존재의 기본 범주들을 검토하고, 중간 부분은 윤회와 업, 속박과 해탈처럼 불교 수행의 근간이 되는 개념들로 나아간다. 뒷부분에서는 자아와 시간, 여래와 열반, 사성제 같은 가장 근본적인 주제들이 다뤄지고, 책은 십이연기와 잘못된 견해들에 대한 검토로 끝난다. 나가르주나는 어떤 개념도 예외로 두지 않는다. 붓다와 열반조차도 자성을 지닌 것으로 붙잡히는 한 검토의 대상이 된다. 이 철저함이야말로 『중론』의 가장 큰 특징이다.
Upasaṃhāra
문턱을 넘으며
이 첫 편에서 우리는 중관학이라는 집의 문 앞에 서서 그 구조를 살펴보았다. 아직 방 안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앞으로의 여정에 꼭 필요한 지도는 손에 쥐었다. 마지막으로 다음 편 이후 계속 되돌아오게 될 한 편의 게송을 미리 보여 주고 이 편을 맺으려 한다. 『중론』 제24품 제18게, 동아시아 불교에서 ‘삼제게(三諦偈)’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인용되고 해석된 게송이다.
सा प्रज्ञप्तिरुपादाय प्रतिपत्सैव मध्यमा ॥ yaḥ pratītyasamutpādaḥ śūnyatāṃ tāṃ pracakṣmahe |
sā prajñaptir upādāya pratipat saiva madhyamā || 眾因緣生法 我說即是空
亦為是假名 亦是中道義 연기인 것, 그것을 우리는 공이라 말한다.
그것은 의존하여 시설된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중도이다.
이 짧은 게송에 이 편에서 만난 거의 모든 개념이 들어 있다. 연기, 공, 가명, 중도. 네 개념은 서로 다른 네 가지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사태를 네 방향에서 바라본 이름이다. 조건에 기대어 생겨나는 세계를 ‘자성이 비어 있음’의 측면에서 보면 공이고, ‘기대어 이름 붙여짐’의 측면에서 보면 가명이며, ‘있다와 없다의 극단을 떠남’의 측면에서 보면 중도다. 이 게송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중국의 천태 교학은 공(空)·가(假)·중(中)의 삼제(三諦)를 세웠고, 인도와 티베트의 주석가들은 저마다 다른 해석의 길을 열었다. 제3편에서 우리는 이 게송을 한 글자씩 풀어 가며 그 논리 구조를 따져 볼 것이다.
이 편의 요점
- 중관(Madhyamaka)은 ‘가운데에 관한 것’을 뜻하며, 그 가운데는 두 극단의 절충이 아니라 ‘있다/없다’라는 틀이 전제하는 자성 자체를 걷어 내는 자리다.
- 나가르주나(2세기경)는 반야경의 공을 논증의 언어로 체계화했고, 그 주된 대결 상대는 법에 자성을 인정한 아비달마, 특히 설일체유부였다.
- 자성은 ‘만들어지지 않고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본성’이다. 공은 ‘없음’이 아니라 ‘자성의 없음’이며, 공을 만나면 늘 ‘무엇이 비어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 연기하는 것은 정의상 의존하는 것이므로 자성이 없다. 따라서 연기와 공은 같은 사태의 두 이름이다. 공하기에 변화도, 업도, 수행도 가능하다.
- 중관은 초기경전의 중도(『깟짜나곳따 경』)와 공(「공한 세상 경」)에 뿌리를 두되, 인무아를 법무아로 확장했다. 공을 다시 견해로 붙잡는 것은 가장 경계해야 할 병이다.
용어 정리
| 우리말 | 산스크리트 | 빠알리 | 한역 | 뜻 |
|---|---|---|---|---|
| 공 | śūnyatā | suññatā | 空 | 자성이 비어 있음 |
| 자성 | svabhāva | sabhāva | 自性 | 만들어지지 않고 의존하지 않는 고유한 본성 |
| 연기 | pratītyasamutpāda | paṭiccasamuppāda | 緣起 | 조건에 의존하여 함께 일어남 |
| 희론 | prapañca | papañca | 戲論 | 개념과 언어의 끝없는 증식 |
| 가명, 시설 | prajñapti | paññatti | 假名·施設 | 의존하여 세운 이름 |
| 중도 | madhyamā pratipad | majjhimā paṭipadā | 中道 | 두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길 |
| 법 | dharma | dhamma | 法 | (아비달마에서) 경험을 이루는 궁극의 요소 |
| 인무아·법무아 | pudgala-/dharma-nairātmya | — | 人無我·法無我 | 사람에게 자아가 없음 / 법에도 자성이 없음 |
제2편 「논적을 알라」에서는 나가르주나의 대결 상대였던 아비달마의 세계로 들어간다. 설일체유부는 왜 ‘모든 것이 있다’고 말했는가, 법의 자성이란 정확히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빠알리 아비담마의 ‘고유한 성질’은 그것과 어떻게 같고 다른가. 과녁을 정확히 알아야 화살의 궤적이 보인다.
Abhyāsa
연습문제
다섯 문제는 쉬운 것부터 어려운 것 순서로 놓여 있다. 선택지를 누르면 바로 채점되며, 채점 후 해설을 펼쳐 볼 수 있다. 마지막 문제는 법학적성시험(LEET) 언어이해 영역의 형식을 따랐다.
해설 펼치기
정답은 ③이다. 공은 언제나 ‘무엇이 비어 있는가’를 물어야 하는 말이며, 중관학에서 비어 있는 것은 자성, 곧 만들어지지 않고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고유한 본성이다.
① 공을 허무로 읽는 대표적인 오해다. 빈 항아리가 여전히 항아리이듯, 공은 사물의 존재나 작용이 아니라 사물의 자성을 부정한다. ② 공을 현상 너머의 실체로 여기는 절대 실재론의 오해다. 공을 실체화하면 새로운 자성을 세우는 셈이 된다. ④ 중관학은 인식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회의론이 아니다. 수레는 여전히 짐을 싣고 달리며, 공은 경험 세계의 작용을 부정하지 않는다. ⑤ 명상 체험의 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공은 모든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 있는지에 대한 규정이다.해설 펼치기
정답은 ①이다. 15.7은 『깟짜야나에게 주신 가르침』을 언급하며, 이는 빠알리 『상윳따 니까야』의 『깟짜나곳따 경』(SN 12.15)에 해당한다. 『중론』 전체에서 경전의 이름을 들어 직접 언급하는 사실상 유일한 사례로, 나가르주나가 자신의 중도를 초기경전의 연장선에 놓았음을 보여 준다.
② 『반야심경』은 『중론』에서 인용되지 않는다. 본문에서는 팔불과 같은 사유 계열에 속한다는 맥락에서만 언급되었다. ③ 와지라 비구니의 게송(SN 5.10)은 수레 비유의 출전으로 본문에 소개되었지만, 『중론』 15.7이 언급하는 가르침은 아니다. ④ 「공한 세상 경」(SN 35.85)의 내용이다. 공이라는 말의 초기경전적 뿌리로 소개되었을 뿐 15.7과는 무관하다. ⑤ 본문은 오히려 『중론』 자체에 ‘대승’이라는 말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으며, 나가르주나가 고른 경전이 초기경전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해설 펼치기
정답은 ③이다. 중관은 수레 비유가 보여 주는 ‘의존하여 시설됨’의 논리를 부품과 궁극의 법에까지 똑같이 적용한다(법무아). 동시에 자성이 없다는 것이 작용이 없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 곧 수레는 가명으로서 여전히 짐을 싣고 달린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① 자성의 부재를 존재와 작용의 부재로 착각한 허무론적 결론이다. 가명은 ‘가짜 이름’이 아니라 ‘기대어 세운 이름’이다. ② 분석을 궁극의 법에서 멈추는 아비달마적 입장이다. 사람의 무아(인무아)까지는 인정하지만 법의 무자성(법무아)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관의 확장과 어긋난다. ④ 『밀린다왕문경』의 대화에서 이미 부정된 선택지다. 부품들과 따로 떨어진 곳에서도 수레는 발견되지 않는다. ⑤ 가명은 임의적인 이름이 아니라 부품들과 조건들에 ‘의존하여’ 세워진다.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그 이름은 성립하지 않는다.해설 펼치기
정답은 ④이다. ④는 ‘작용하려면 자성이 있어야 한다’는 숨은 전제를 깔고 있는데, 이것은 자성의 정의에서 도출되는 명제가 아니라 제24품의 논적이 품고 있는 가정이다. 나가르주나는 이 가정을 정반대로 뒤집는다. 자성을 가진 것은 변할 수 없으므로 오히려 작용할 수 없고, 공한 것, 곧 조건에 의존하는 것이기에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24.14). 수레의 작용이 부정되지 않는다는 본문의 논의와도 정면으로 어긋난다.
①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음’이라는 조건에서 곧바로 따라 나온다. 조건에 기대어서만 발휘되는 힘이라면 그것은 씨앗의 자성이 아니다. ② ‘만들어지지 않음’이라는 조건의 대우(對偶)다. 만들어진 것이라면 자성이 아니다. ③ 두 조건을 함께 적용한 결과다. 만들어지지 않고 의존하지 않는 것은 조건에 따라 생겨나거나 사라질 수 없다. 본문은 이것을 ‘자성이 있다면 이 변화하는 세계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나가르주나 논증의 기본 골격으로 소개했다. ⑤ 본문에서 직접 든 예다. 비교 대상에 의존하는 성질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음’을 만족하지 못한다.고대 인도의 논쟁 전통에서 논증은 대개 논자가 자신의 ‘주장(pratijñā)’을 먼저 세우고 그 근거를 제시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 형식 아래에서 논자는 자신이 세운 주장에 대해 책임을 지며, 그 주장이 스스로 모순을 함축하는 것으로 드러나면 논쟁에서 패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나가르주나의 『회쟁론』에 등장하는 실재론자 논적은 이 규칙을 나가르주나 자신에게 되돌려 다음과 같은 양도논법을 제시한다.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다’는 그대의 말은 자성을 가지거나 가지지 않는다. 만일 자성을 가진다면, 자성을 가진 것이 적어도 하나 존재하므로 그대의 주장은 그 자신에 의해 거짓이 된다. 만일 자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자성 없는 말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사물의 자성을 부정하지 못한다.
나가르주나의 응답은 세 갈래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자신의 말에 자성이 없다는 쪽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다만 그는 두 번째 갈래가 암묵적으로 기대고 있는 전제, 곧 무엇이든 작용하려면 자성을 가져야 한다는 전제를 거부한다. 수레나 옷이나 항아리가 자성 없이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났으면서도 짐을 나르고 몸을 가리고 물을 담듯이, 자성 없는 말도 부정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자성을 가진 것이라면 조건에 따라 생겨나거나 작용할 수 없다고 본다. 둘째, 그는 어떤 사람이 환술로 만들어진 여인을 실제 여인으로 여겨 집착할 때 역시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이 나타나 그 그릇된 생각을 가로막는 장면을 비유로 든다. 그의 부정이 막아서는 것은 실재하는 무엇이 아니라 자성이 있다고 여기는 그릇된 파악이라는 것이다. 셋째, 그는 “만일 나에게 어떤 주장이 있다면 그 허물이 나에게 있겠지만, 나에게는 주장이 없으므로 허물도 없다”고 말한다.
이 세 번째 응답의 의미를 두고 해석이 갈린다. 해석 A에 따르면, 이는 나가르주나가 어떤 문장도 발화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발화하는 문장들은 자성을 가진 대상을 지시하면서 그 대상에 관해 무엇이 참임을 확립하려는 명제가 아니며, 오직 논적이 받아들인 전제들로부터 논적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귀결을 끌어내는 데 쓰일 뿐이다. 따라서 그는 논적의 전제와 독립하여 자기 편의 입장을 확립하지 않는다. 해석 B에 따르면, 여기서 없다고 한 ‘주장’은 자성을 가진 대상에 관한 궁극적 차원의 주장에 한정된다. 나가르주나는 세속의 차원에서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다’는 명제를 참으로 주장하고 그 근거를 제시할 수 있으며, 그에게 허물이 없는 까닭은 주장이 전혀 없어서가 아니라 그의 주장이 자성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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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①(ㄱ, ㄴ)이다. 이 문제는 논증의 구조(양도논법과 숨은 전제)를 파악하는 능력, 그리고 두 해석이 같은 문장을 어떻게 다르게 읽는지를 정확히 구별하는 능력을 함께 요구한다.
ㄱ. 옳다. 두 번째 갈래(‘자성 없는 말은 부정하지 못한다’)는 ‘작용하려면 자성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 없이는 성립하지 않으며, 첫째 응답은 바로 이 전제를 거부한다. 나아가 둘째 문단은 나가르주나가 ‘자성을 가진 것이라면 조건에 따라 생겨나거나 작용할 수 없다’고 본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첫 번째 갈래에서 상정된 자성 있는 말은 조건에 따라 작용할 수 없으므로 부정의 작용도 할 수 없다. 논적의 전제가 단순히 거부되는 데 그치지 않고 정반대로 뒤집히는 것이다. ㄴ. 옳다. 해석 A에서 나가르주나의 문장은 ‘오직 논적이 받아들인 전제들로부터’ 받아들일 수 없는 귀결을 끌어내는 데 쓰이며, ‘논적의 전제와 독립하여’ 자기 입장을 확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논증이 갖는 반박의 힘은 상대가 그 전제를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전제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같은 논증이 모순을 드러내지 못하므로 반박의 힘을 갖지 못한다. 이는 훗날 귀류논증(prasaṅga)이라 불리는 방식의 핵심적 성격이며, 제4편과 제11편에서 다시 다룬다. ㄷ. 옳지 않다. 해석 B에서 나가르주나에게 허물이 없는 이유는 ‘그의 주장이 자성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자성 없는 말도 작용할 수 있다는 첫째 응답과 정확히 들어맞는다. 자성을 전제하지 않는 세속적 주장이 근거를 갖추고 참으로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자성 없는 말이 기능한다는 첫째 응답을 전제로 삼을 때 가능하다. 두 응답은 긴장 관계가 아니라 상호 지지 관계에 있다. ㄹ. 옳지 않다. 해석 B는 나가르주나가 세속의 차원에서 그 명제를 참으로 주장한다고 보지만, 해석 A는 그의 문장들이 ‘무엇이 참임을 확립하려는 명제가 아니’라고 본다. 해석 A에서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다’는 문장은 참을 확립하는 주장이 아니라 논적의 전제에서 귀결을 끌어내는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두 해석이 그 점에 견해를 같이한다는 진술은 해석 A와 어긋난다. ‘어떤 차원에서든’이라는 표현이 해석 B의 세속적 주장을 끌어들여 두 해석을 뭉뚱그리려는 함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