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이기는 법
논쟁술로서의 인명 — 『니야야 수트라』와 고인명(古因明)
논쟁술로서의 인명 — 『니야야 수트라』와 고인명(古因明)
기원전 2세기 무렵 서북 인도를 다스린 그리스계 왕 메난드로스는 빠알리 문헌에 밀린다 왕으로 남아 있습니다. 『밀린다빵하』, 곧 『밀린다왕문경』에 따르면 이 왕은 논쟁을 몹시 좋아해서 이름난 사문과 바라문을 불러 문답하다가 번번이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곤 했습니다. 그런 왕이 나가세나 존자를 만나 “존자여, 나와 대론하시겠습니까?” 하고 묻자, 나가세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조건을 겁니다. 대왕께서 현자의 방식(paṇḍitavāda)으로 논하신다면 응하겠지만, 왕의 방식(rājavāda)으로 논하신다면 응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두 방식은 무엇이 다를까요. 나가세나의 설명을 풀어 옮기면 이렇습니다. 현자들이 논할 때는 한쪽이 매듭을 짓고 다른 쪽이 그것을 풀며, 한쪽이 논박하면 다른 쪽이 그것을 인정하고, 구별이 세워지고 반대 구별이 세워지지만, 그 과정에서 현자들은 누구도 성내지 않습니다. 반면 왕들이 논할 때는 왕이 무언가를 주장하고, 누구든 그에 반대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리라고 명합니다. 왕은 기꺼이 현자의 방식으로 논하겠다고 약속하고, 이로부터 저 유명한 문답이 시작됩니다.
이 짧은 일화 안에 이번 편의 주제가 거의 다 들어 있습니다. 논쟁에는 규칙이 있어야 하고, 그 규칙은 힘이 아니라 이성에 복종해야 하며, 논박당한 자는 그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논쟁은 이기기 위한 것일 수도, 진리를 함께 찾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1편에서 우리는 인명이 디그나가를 기점으로 논쟁술에서 인식론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편은 그 이전, 인명이 아직 ‘말로 이기는 법’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힌두 쪽에서는 『니야야 수트라』가 정리한 열여섯 범주와 세 가지 논쟁의 유형, 다섯 지분의 논증 형식, 그리고 논쟁에서 지는 방법들의 정교한 목록을 살피고, 불교 쪽에서는 붓다의 대답 방식에서 『까타왓투』의 논박 문답, 『유가사지론』의 논쟁 교본과 세친의 『논궤』에 이르는 고인명의 흐름을 따라갑니다.
고대 인도에서 논쟁 교본을 남긴 것은 철학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인도 의학의 고전인 『짜라까 상히따』에도 의사들이 서로 토론할 때 지켜야 할 규칙과 용어를 정리한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벗처럼 협력하며 배우기 위한 토론과, 상대를 꺾기 위해 맞서는 적대적 토론을 구별하고, 적대적 토론에서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요령까지 다룹니다. 의학 문헌에 이런 내용이 있다는 사실은 논쟁이 특정 학파의 전유물이 아니라 학문 공동체 전체의 공용어였음을 보여 줍니다. 스승을 모시는 제자도, 후원자를 찾는 학자도, 새로운 교단을 세우려는 수행자도 공개 논쟁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공개 논쟁에는 대개 세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논쟁을 벌이는 두 당사자, 그리고 판정을 맡는 심판과 청중입니다. 후대 문헌은 이 심판단을 ‘회중의 일원’이라는 뜻의 sabhya, 또는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은 ‘중립자’(madhyastha)라고 불렀습니다. 승패는 대개 이들이 판정했고, 왕이 후원하는 논쟁이라면 그 결과에 따라 사원의 토지나 후원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판정자가 존재한다는 조건은 논쟁 이론의 모양을 크게 규정했습니다. 판정자가 있으려면 ‘언제 누가 졌는가’를 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도 논리학이 무엇이 좋은 논증인가 못지않게 무엇이 패배인가를 집요하게 분류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니야야 학파의 근본 경전 『니야야 수트라』는 전통적으로 악샤파다 가우따마의 작품으로 전해지지만, 오늘날 학자들은 여러 시기에 걸쳐 형성된 층위들이 대략 기원후 2세기 전후에 지금의 모습으로 정리되었다고 봅니다. 전체는 다섯 권(adhyāya)이며 각 권은 다시 두 부분(āhnika, ‘하루 분량’)으로 나뉩니다. 수트라란 본래 ‘실’을 뜻하는데, 기억하기 쉽도록 극도로 압축한 경구들을 한 줄로 꿰어 놓은 형식입니다. 그래서 수트라만으로는 뜻이 잘 통하지 않고, 왓스야야나의 『니야야 바샤』 같은 주석과 함께 읽어야 비로소 살이 붙습니다.
왓스야야나는 이 경전이 세 가지 절차로 짜여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먼저 다룰 것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이어서 각각을 다른 것과 구별해 주는 정의를 내리며, 마지막으로 그 정의가 옳은지를 반론과 재반론을 통해 검토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1권은 열여섯 범주를 열거하고 정의하며, 제2권부터 제4권까지는 그 가운데 주요 항목들을 검토하고, 제5권은 논쟁에서의 그릇된 반박과 패배처를 상세히 분류합니다. 이 세 단계의 방법은 이후 인도 학술 문헌 전반의 표준적 서술 방식이 되었습니다.
요체. 고대 인도에서 논쟁은 판정자와 청중이 있는 공적 제도였고, 그래서 ‘좋은 논증’만큼 ‘패배의 기준’이 중요했다. 『니야야 수트라』는 다섯 권 열 부분으로 이루어지며, 열거·정의·검토의 세 단계로 짜여 있다.
『니야야 수트라』의 첫 경문은 이 학파 전체의 선언문입니다. 한 문장이지만 열여섯 개의 낱말이 긴 복합어로 이어져 있어서, 그 자체로 하나의 목록이자 약속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문장의 결론부입니다. 이 열여섯 가지를 참되게 알면 지복(niḥśreyasa), 곧 해탈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궤변과 패배처의 목록을 아는 것이 어떻게 해탈과 이어질까요. 니야야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해탈은 자아를 비롯한 실재에 대한 올바른 앎에서 오고, 그 올바른 앎은 올바른 인식 수단과 올바른 탐구의 절차를 통해 얻어지며, 그렇게 얻은 앎은 그릇된 논쟁으로부터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여섯 범주는 그러니까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목록이 아니라, 앎을 얻고 지키는 과정의 지도입니다. 두 번째 범주인 인식 대상도 존재하는 모든 것이 아니라 해탈과 관련된 열두 가지, 즉 자아·신체·감관·감관의 대상·인식·마음·활동·결함·재생·과보·괴로움·해탈로 한정된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아래의 연꽃은 열여섯 범주를 연잎 한 장씩에 담은 것입니다. 잎을 누르거나 아래 단추로 차례로 넘기며 각 범주의 뜻을 살펴보십시오. 잎의 색은 범주들이 이루는 네 무리를 나타냅니다.
‘범주’로 옮긴 padārtha는 ‘낱말(pada)이 가리키는 것(artha)’이라는 뜻입니다. 니야야는 이 열여섯 낱말의 대상을 참되게 알면 지복에 이른다고 선언합니다.
네 무리로 나누어 보면 목록의 논리가 드러납니다. 먼저 앎의 토대로서 무엇으로 알고(인식 수단) 무엇을 아는가(인식 대상)가 놓입니다. 이어서 탐구의 절차가 옵니다. 탐구는 의심에서 출발하고, 목적이 탐구를 이끌며, 모두가 공유하는 실례와 이미 확정된 정설이 발판이 되고, 다섯 지분의 논증과 가설적 검토인 사택을 거쳐, 마지막에 결정에 이릅니다. 탐구가 두 사람 이상 사이에서 벌어지면 그것은 논쟁의 형식을 띠게 되고, 논쟁에는 필연적으로 오류와 패배가 따릅니다. 한 사람의 마음속 탐구에서 출발해 공적 논쟁의 장으로 확장되는 흐름이 목록의 순서 자체에 새겨져 있는 셈입니다.
여덟째 범주 사택은 오늘날의 귀류법과 닮은 가설적 추론입니다. 무언가를 직접 증명하는 대신 “만약 반대가 옳다면 이러저러한 불합리한 결과가 따를 것이다”라고 보임으로써 올바른 판단 쪽으로 저울을 기울게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만약 산에 불이 없다면 연기도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연기가 있다”는 식입니다. 니야야는 사택을 그 자체로 독립된 인식 수단으로 보지 않고, 인식 수단을 돕는 보조 장치로 보았습니다. 사택과 귀류의 관계는 나가르주나의 논법을 다루는 제3편에서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요체. 열여섯 범주는 앎의 토대(1–2), 탐구의 절차(3–9), 논쟁의 형식(10–12), 오류와 패배(13–16)로 이어지는 ‘앎을 얻고 지키는 과정의 지도’이며, 니야야는 이를 참되게 아는 것이 해탈의 길이라고 본다.
『니야야 수트라』 제1권 둘째 부분은 논쟁을 세 가지로 나누고 각각을 정의합니다. 이 세 정의는 짧지만 매우 정교하게 서로 맞물려 있어서, 하나씩 떼어 읽기보다 차례로 겹쳐 읽는 편이 좋습니다.
첫째 논의(vāda)는 한 주제를 두고 한쪽이 주장을, 다른 쪽이 반대 주장을 받아들여 다투되, 증명과 비판을 인식 수단과 사택으로써 하고, 각자가 받아들인 정설에 어긋나지 않으며, 다섯 지분을 갖춘 논쟁입니다(1.2.1). 둘째 쟁론(jalpa)은 앞서 말한 조건을 갖추되, 궤변과 오난과 패배처로써도 증명하고 비판하는 논쟁입니다(1.2.2). 셋째 파괴론(vitaṇḍā)은 그 쟁론 가운데 반대 주장의 확립이 빠진 것입니다(1.2.3). 여기서 ‘반대 주장’이란 파괴론을 펼치는 사람 자신의 입장을 가리킵니다. 파괴론자는 상대의 입장을 무너뜨리는 데 온 힘을 쏟을 뿐, 자기 입장을 논증으로 세우지 않습니다.
그림 2. 세 논쟁 유형. 아래 막대는 적대성의 정도를 나타낸다. 목적의 구분은 주석 전통의 해설을 따랐다.
주석 전통은 목적의 차이를 덧붙입니다. 논의는 진리를 확정하려는 사람들, 예컨대 스승과 제자처럼 서로 시기하지 않는 이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쟁론과 파괴론은 승리를 원하는 이들 사이에서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니야야는 쟁론과 파괴론을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뜻밖에도 『니야야 수트라』는 이 둘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명시적으로 정당화합니다.
이 비유는 니야야의 논쟁관을 정확하게 요약합니다. 진리를 향한 탐구는 연약한 싹과 같아서, 그것을 짓밟으려는 이들, 곧 명성이나 교만 때문에 달려드는 논적들로부터 보호받아야 합니다. 그 보호막이 날카로운 가시로 되어 있다고 해서 싹을 키우는 일 자체가 가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승리를 목표로 하는 논쟁의 정당성은 승리 그 자체에서 오지 않고, 이미 얻은 진리를 지킨다는 더 상위의 목적에서 파생됩니다. 이 구분은 이번 편 마지막 연습문제에서 다시 중요해집니다.
파괴론에 대해서는 오랜 논란이 있습니다. 자기 입장을 세우지 않는 논쟁자에게 정말 입장이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입장이 있지만 드러내지 않는 것일까요. 니야야 주석가들은 대체로 후자로 봅니다. 상대를 공격하는 사람은 적어도 ‘상대의 주장이 틀렸다’는 입장은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논란은 불교사에서 특별한 무게를 갖습니다. “나에게는 어떤 주장도 없다”고 말한 나가르주나가 니야야의 눈에는 전형적인 파괴론자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중관이 과연 파괴론인가라는 물음은 제3편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체. 논의는 인식 수단과 사택만으로 진리를 확정하는 논쟁, 쟁론은 궤변 등까지 동원해 이기려는 논쟁, 파괴론은 자기 입장의 확립이 빠진 쟁론이다. 니야야는 쟁론과 파괴론을 ‘싹을 지키는 가시 울타리’로 정당화한다. 그 정당성은 승리가 아니라 진리의 보호라는 상위 목적에서 온다.
제1편에서 우리는 연기 나는 산을 예로 오지작법의 윤곽을 보았습니다. 이제 『니야야 수트라』의 정의를 따라 각 지분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살펴봅시다. 이번에는 왓스야야나가 주석에서 쓰는 예, 곧 “소리는 무상하다”는 논증을 따라가겠습니다. 이 논증은 불교 인명에서도 표준 예문이 되어, 두 전통이 같은 문장을 두고 서로 다른 형식을 겨룬 무대이기도 합니다.
주장(pratijñā)은 증명되어야 할 것을 지시하는 말입니다(1.1.33). “소리는 무상하다.” 이유(hetu)는 실례와의 공통성을 통해 증명될 것을 증명하는 근거를 말하는 것입니다(1.1.34). “생겨나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실례와의 공통성’이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이유는 그 자체로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실례와 짝을 이루어야 제 구실을 합니다. 경전은 이유가 실례와의 차이성을 통해서도 증명할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1.1.35).
실례(udāharaṇa)는 두 가지입니다. 증명될 것과 같은 성질을 지님으로써 그 속성을 지니는 실례, 곧 긍정의 실례가 있고(1.1.36), 그 반대로 증명될 것과 다른 성질을 지님으로써 그 반대를 보여 주는 부정의 실례가 있습니다(1.1.37). “생겨나는 속성을 지닌 것은 무상하다, 그릇처럼”이 앞의 것이고, “생겨나는 속성을 지니지 않은 것은 상주한다, 아트만처럼”이 뒤의 것입니다. 적용(upanaya)은 실례에 비추어 주제를 “그와 같다” 또는 “그와 같지 않다”고 다시 거두어들이는 것이며(1.1.38), 결론(nigamana)은 이유를 진술한 뒤 주장을 다시 말하는 것입니다(1.1.39).
아래 조립기에서 다섯 문장을 올바른 순서대로 눌러 보십시오. 긍정의 실례를 쓰는 형식과 부정의 실례를 쓰는 형식을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부정의 실례를 쓸 때 적용 지분이 “그와 같지 않다”로 바뀌는 점을 눈여겨보십시오.
카드를 순서대로 누르면 아래 칸이 채워집니다.
이 다섯 지분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왓스야야나는 흥미로운 설명을 남깁니다. 다섯 지분은 네 가지 인식 수단이 하나의 논증 안에 모두 모여든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주장은 신뢰할 만한 말에, 이유는 추론에, 실례는 지각에, 적용은 비유에 대응하고, 결론은 이 모두가 하나의 대상 위에서 합쳐졌음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와 별개로, 니야야에게 논증 형식이 인식 수단의 이론과 긴밀하게 얽혀 있었음을 잘 보여 줍니다. 논증은 단지 말의 순서가 아니라 네 개의 저울이 한 자리에서 함께 무게를 다는 장면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왓스야야나는 어떤 이들이 다섯이 아니라 열 개의 지분을 주장한다고 전합니다. 알고자 하는 욕구, 의심, 증명의 가능성, 목적, 의심의 해소 같은 요소를 덧붙이는 것인데, 그는 이것들이 탐구의 심리적 과정일 뿐 논증을 구성하는 지분은 아니라며 물리칩니다. 논증의 형식에서 심리적 과정을 걸러 내려는 이 태도는, 뒤에 디그나가가 다섯 지분마저 셋으로 줄이는 방향과 같은 선 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체. 오지는 주장·이유·실례·적용·결론이며, 실례와 적용에는 긍정형(“그와 같다”)과 부정형(“그와 같지 않다”)이 있다. 왓스야야나는 다섯 지분을 네 인식 수단의 합류로 해석했고, 열 지분설은 심리적 과정을 섞었다며 물리쳤다.
열여섯 범주의 마지막 넷은 모두 논쟁에서 잘못되는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목록의 네 분의 일이 오류에 바쳐졌다는 사실은 인도 논리학이 얼마나 실전적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네 가지를 차례로 살펴보되, 각각이 어디에서 잘못되는지를 구별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사인은 논증의 이유가 잘못된 것이고, 궤변은 상대의 말을 비트는 것이며, 오난은 반박의 방식이 잘못된 것이고, 패배처는 논쟁이 끝나는 지점, 곧 패배가 확정되는 조건입니다.
사인(似因, hetvābhāsa)은 ‘이유의 겉모습’이라는 뜻입니다. 『니야야 수트라』는 다섯 가지를 듭니다(1.2.4 이하). 제1편에서 맛본 디그나가의 삼상 이론과 나란히 놓아 보면, 두 전통이 같은 현상을 서로 다른 그물로 건져 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른쪽 열은 디그나가 체계에서 대략 대응하는 자리를 적은 것으로, 대응이 정확히 일대일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 주십시오. 자세한 비교는 제6편에서 다룹니다.
| 니야야의 사인 | 뜻 | 예 | 디그나가 체계의 대응 |
|---|---|---|---|
| 동요인 savyabhicāra | 이유가 한쪽 결론에만 머물지 않음 | 소리는 상주한다, 촉감이 없으므로. (촉감 없는 인식은 무상하고, 촉감 있는 원자는 상주한다고 여겨짐) | 부정인(不定因) |
| 상위인 viruddha | 받아들인 정설과 모순되는 이유 | 이유가 오히려 반대 결론을 뒷받침함 | 상위인(相違因) |
| 문제와 같은 인 prakaraṇasama | 논란을 낳은 바로 그 사정을 이유로 내세워 대등한 반대 논증을 부름 | 양측이 서로 다른 특징에 기대어 결론을 내지 못하는 상황 | 상위결정(相違決定)과 유사 |
| 소증과 같은 인 sādhyasama | 이유 자체가 증명될 것처럼 아직 증명을 요함 | 그림자는 실체다, 움직이므로. (그림자가 스스로 움직이는지부터 증명 필요) | 불성인(不成因) |
| 때를 넘긴 인 kālātīta | 다른 인식 수단에 의해 이미 반박된 주장에 쓰인 이유 (후대의 해석) | 불은 차갑다, 실체이므로. (지각에 의해 반박됨) | 종(宗)의 과실, 현량상위 |
궤변(chala)은 상대가 의도한 뜻을 일부러 다른 뜻으로 받아들여 공격하는 것입니다(1.2.10). 『니야야 수트라』는 이를 셋으로 나눕니다. 아래 카드를 눌러 각각의 사례와 풀이를 확인해 보십시오. 사례는 주석 전통에서 전해 오는 고전적인 예들입니다.
갑 저 젊은이는 새 담요를 가졌구려.
을 아홉 장이라니요? 한 장뿐인데.
산스크리트어 nava는 ‘새로운’과 ‘아홉’을 모두 뜻합니다. 을은 갑이 의도한 ‘새 담요’를 일부러 ‘아홉 장의 담요’로 받아들여 반박합니다. 한 낱말이 여러 뜻을 가질 때 화자가 의도하지 않은 뜻을 골라 공격하는 것이 말의 곡해입니다.
갑 이 바라문은 학식과 덕행을 갖추었구려.
병 바라문이니 그럴 만하지요.
을 바라문이면 그럴 만하다면, 입문 의례도 치르지 않은 바라문도 학식과 덕행을 갖추어야겠구려.
병의 말은 ‘바라문이라는 신분이 학식과 덕행의 좋은 토양이 된다’는 뜻이지, ‘모든 바라문이 반드시 그렇다’는 뜻이 아닙니다. 을은 이를 지나치게 넓은 보편 명제로 부풀린 뒤 반례를 들이댑니다. 제한된 뜻으로 한 말을 무제한의 일반 명제로 확대해 공격하는 것이 일반화의 곡해입니다.
갑 침상들이 떠들썩하구려.
을 침상은 나무일 뿐, 어찌 떠들 수 있겠소.
갑은 침상 위에 앉은 사람들이 떠든다는 뜻으로 환유적 표현을 썼습니다. 을은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반박합니다. 비유나 환유로 한 말을 문자적 의미로 되받아 공격하는 것이 비유의 곡해입니다. 우리말의 “교실이 시끄럽다”를 “교실은 벽과 바닥일 뿐”이라고 받아치는 것과 같습니다.
오난(誤難, jāti)은 상대 논증의 구조를 제대로 따지지 않고 단지 겉으로 드러난 유사성이나 차이성에 기대어 반박하는 것입니다(1.2.18). 『니야야 수트라』 제5권은 무려 스물네 가지를 분류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유사성에 의한 동등화’(sādharmyasama)입니다. 누군가 “소리는 무상하다,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릇처럼”이라고 논증했을 때, 상대가 “소리는 상주한다, 형체가 없으므로, 허공처럼”이라고 되받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같은 형식의 논증이지만, ‘형체 없음’과 ‘상주’ 사이에는 ‘만들어짐’과 ‘무상’ 사이 같은 불변의 결합이 없습니다. 형식의 겉모양만 흉내 낸 반박인 셈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이 ‘무한 퇴행을 요구하는 반박’(prasaṅgasama)입니다. “그릇이 무상하다는 것은 또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그 증명의 실례는 또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하고 끝없이 근거의 근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니야야는 실례란 본래 양측이 모두 인정하는 것이므로 이런 요구가 부당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제1편에서 본 나가르주나의 물음, “프라마나로 대상을 확립한다면 그 프라마나는 무엇으로 확립하는가”를 떠올려 보십시오. 니야야의 눈에는 이 물음이 오난의 일종처럼 보일 수 있었고, 나가르주나에게는 그것이 니야야의 토대를 흔드는 정당한 질문이었습니다. 무엇이 정당한 반박이고 무엇이 부당한 트집인가를 가르는 경계선 자체가 논쟁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패배처(nigrahasthāna)는 ‘붙잡히는 자리’라는 뜻으로, 논쟁자가 패배한 것으로 확정되는 조건입니다. 『니야야 수트라』는 그 뿌리를 둘로 정리합니다. 잘못 이해하는 것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1.2.19). 이 두 뿌리에서 제5권의 스물두 가지 세부 항목이 뻗어 나옵니다. 그 가운데 몇을 골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파랑은 자기 주장을 지키지 못한 경우, 황색은 말하는 방식의 결함, 붉은색은 응답과 태도의 결함입니다.
목록을 훑어보면 패배처가 논증의 형식적 결함만이 아니라 논쟁자의 행동까지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대의 주장을 정확히 되풀이해 말하지 못하는 것, 볼일을 핑계로 자리를 뜨는 것, 자기 허물을 인정하면서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맞서는 것이 모두 패배입니다. 특히 상대의 주장을 정확히 재진술하지 못하면 진다는 규칙은 오늘날의 토론 문화에도 울림이 있습니다. 반박하기 전에 먼저 상대를 정확히 이해했음을 보여야 한다는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요체. 사인은 이유의 결함, 궤변은 상대 말의 곡해(말·일반화·비유의 셋), 오난은 겉모양의 유사성과 차이성에 기댄 그릇된 반박(스물넷), 패배처는 잘못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함에서 비롯되는 패배의 조건(스물둘)이다. 패배처는 논증의 형식뿐 아니라 논쟁자의 행동까지 판정한다.
이제 불교 쪽으로 눈을 돌립시다. 흥미롭게도 초기 불교 경전에는 논쟁에 대한 두 얼굴이 함께 나타납니다. 한편으로 『숫따니빠따』의 가장 오래된 층으로 여겨지는 「앗타까왁가」에는 논쟁 자체에 대한 깊은 경계가 담겨 있습니다. 대중 앞에서 논쟁하는 이들은 칭찬을 바라고, 이기면 우쭐하며, 지면 풀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저마다 “이것만이 진리”라고 붙들고 다투는 모습은 집착의 한 형태로 그려집니다. 「깔라마 경」은 전통이나 소문, 경전의 권위뿐 아니라 논리(takka)나 추론(naya)에 근거해서도 무언가를 받아들이지 말고, 스스로 그것이 선한지 불선한지를 알게 될 때 받아들이라고 가르칩니다. 논리만으로는 해탈에 이르지 못한다는 경고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붓다 자신은 뛰어난 대화자이자 논쟁자로 그려집니다. 이름난 논객 삿짜까가 붓다를 굴복시키겠다고 큰소리치며 찾아왔다가 도리어 말문이 막히는 일화가 『맛지마 니까야』에 전하고, 경전 곳곳에서 붓다는 상대의 전제를 받아들인 뒤 그 전제에서 상대가 원치 않는 결론을 끌어내는 방식으로 대화를 이끕니다. 무엇보다 초기 경전은 질문에 답하는 네 가지 방식을 체계적으로 구별합니다. 이것은 불교 논쟁술의 가장 오래된 씨앗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대답의 방식 | 빠알리 | 언제 쓰는가 | 예 |
|---|---|---|---|
| 단정적 대답 일향기 一向記 | ekaṃsabyākaraṇīya | 예외 없이 한 방향으로 답할 수 있는 물음 | “형성된 것들은 모두 무상합니까?” — “그렇다.” |
| 나누어 대답 분별기 分別記 | vibhajjabyākaraṇīya | 대상에 따라 답이 갈리므로 나누어 답해야 하는 물음 | “출가자는 모두 해탈에 이릅니까?” — “바르게 수행하는 이는 이르고, 그렇지 않은 이는 이르지 못한다.” |
| 되물어 대답 반힐기 反詰記 | paṭipucchābyākaraṇīya | 질문의 기준이 불분명하여 먼저 되물어 기준을 확정해야 하는 물음 | “그 길은 멉니까?” — “그대는 어디서 출발하는가?” |
| 제쳐 두는 대답 사치기 捨置記 | ṭhapanīya | 잘못된 전제 위에 서 있거나 해탈에 도움 되지 않아 답하지 않는 물음 | 세계의 영원 여부, 여래의 사후 존재 여부 같은 무기(無記)의 물음 |
이 가운데 ‘나누어 대답하기’는 특히 테라와다 전통의 자기 이해와 깊이 얽혀 있습니다. 테라와다는 스스로를 분별설부(分別說部, vibhajjavāda), 곧 ‘나누어 설하는 이들’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한 칼에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조건에 따라 구별해 답한다는 태도 자체가 하나의 학파 정체성이 된 것입니다.
빠알리 아비담마 칠론 가운데 하나인 『까타왓투』(Kathāvatthu, 『논사(論事)』)는 불교 논쟁 문헌의 가장 이른 체계적 사례입니다. 전통에 따르면 아쇼카 왕 시대에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가 제3차 결집에서 이단적 견해들을 논파하기 위해 편찬했다고 하며, 현재의 모습에는 후대에 덧붙여진 부분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 책은 다른 부파의 견해 이백여 가지를 하나씩 들고 나와 정해진 형식의 문답으로 논박합니다. 그 첫 번째이자 가장 긴 논쟁은 윤회의 주체로서 ‘인격체’(puggala)가 궁극적으로 실재한다고 보는 견해, 곧 뿍갈라론자들을 겨냥합니다. 그 첫머리를 읽어 봅시다.
이 문답의 구조를 분해해 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상대의 입장을 질문의 형태로 확인합니다(P를 긍정함). 이어서 그 입장에서 따라 나와야 할 명제를 묻습니다(Q를 물음). 상대가 Q를 부정하면, ‘P라면 Q여야 한다’는 연결을 근거로 상대가 P를 긍정하면서 Q를 부정하는 것은 함께 유지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쓰인 niggaha, 곧 ‘붙잡음, 논박’이라는 낱말에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니야야의 패배처(nigrahasthāna)에 들어 있는 바로 그 낱말 nigraha의 빠알리 형태입니다. 불교와 니야야가 같은 논쟁 문화의 어휘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형식에는 실례가 없습니다. 연기와 아궁이 같은 경험적 사례에 기대지 않고, 오직 상대가 스스로 한 긍정과 부정 사이의 정합성만을 문제 삼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까타왓투』의 논법을 오늘날의 명제 논리에 더 가깝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 논박은 상대가 ‘P라면 Q’라는 연결을 받아들일 때에만 성립한다는 한계도 지닙니다. 실제로 『까타왓투』의 뿍갈라 논쟁은 이 첫 단계에서 끝나지 않고, 상대가 연결 자체를 문제 삼을 여지를 차례로 막아 가며 여러 갈래로 길게 이어집니다.
요체. 초기 불교는 논쟁에 대한 경계(「앗타까왁가」, 「깔라마 경」)와 대화 기술(네 가지 대답 방식)을 함께 지녔다. 『까타왓투』는 상대가 긍정한 명제와 부정한 명제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문답으로 논박하며, 그 핵심어 niggaha는 니야야의 nigraha와 같은 말이다.
대승 불교가 체계적인 논쟁 이론을 갖춘 것은 유가행파의 대논서 『유가사지론』에서입니다. 이 논서의 「본지분」 문소성지(聞所成地)에는 오명을 설명하는 가운데 인명을 다루는 부분이 있는데, 동아시아 전통은 여기서 제시된 일곱 항목을 칠인명(七因明)이라 불러 왔습니다. 그 구성을 보면 『유가사지론』의 인명이 무엇보다 논쟁의 실천 교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항목 | 다루는 것 | 주요 내용 (대략) |
|---|---|---|
| 논체성 論體性 | 말의 본질과 종류 | 언론·상론·쟁론·훼방론·순정론·교도론의 여섯 가지 말 |
| 논처소 論處所 | 논쟁이 벌어지는 자리 | 왕궁, 관청, 대중, 현자 앞, 법의에 밝은 사문·바라문 앞 등 |
| 논소의 論所依 | 논증의 근거 | 성립시킬 것 둘(자성·차별), 성립시키는 수단 여덟(입종·변인·인유·동류·이류·현량·비량·정교량) |
| 논장엄 論莊嚴 | 논자가 갖출 품격 | 자타의 교설에 밝음, 말의 원만함, 두려움 없음, 돈독하고 엄숙함, 존중받을 만함 |
| 논타부 論墮負 | 패배 | 말을 버림(사언), 말이 꺾임(언굴), 말의 허물(언과) |
| 논출리 論出離 | 논쟁에 나설지의 판단 | 이익과 손실, 때와 청중, 자신의 능숙함을 먼저 살핌 |
| 논다소작법 論多所作法 | 논쟁에 크게 도움 되는 것 | 자타의 교설에 밝음, 용맹하여 두려움 없음, 막힘없는 변재 |
이 가운데 강조 표시한 ‘논소의’를 자세히 보십시오. 논증을 성립시키는 여덟 가지 수단 가운데 앞의 다섯, 즉 주장을 세움(입종), 이유를 밝힘(변인), 실례를 끌어옴(인유), 같은 부류(동류), 다른 부류(이류)는 논증의 지분에 해당하고, 뒤의 셋인 지각(현량), 추론(비량), 올바른 가르침(정교량)은 인식 수단에 해당합니다. 두 가지 사실이 눈에 띕니다. 첫째, 이 단계에서 인식 수단은 논쟁을 떠받치는 토대가 아니라 논증을 구성하는 여러 부품 가운데 일부로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둘째, 인식 수단이 셋이며 경전의 권위가 그 안에 독립된 자리를 차지합니다. 제1편에서 본 디그나가가 인식 수단을 둘로 줄이고 그것을 인명 전체의 토대로 끌어올렸다는 사실과 대조하면, 신인명의 전환이 얼마나 근본적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같은 부류’와 ‘다른 부류’라는 항목에서는 뒷날 삼상 이론의 동품과 이품으로 자라날 씨앗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논출리’입니다. 논쟁에 나서기 전에, 이 논쟁이 자신과 남에게 이익이 되는지, 청중이 공정하고 지혜로운지, 자신이 충분히 능숙한지를 먼저 살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논쟁을 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이는 쟁론과 파괴론을 ‘진리를 지키는 가시 울타리’로 정당화한 니야야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룹니다. 니야야가 논쟁 유형의 정당성을 그것이 봉사하는 상위 목적에서 찾았다면, 『유가사지론』은 개별 논쟁에 나서기 전에 그것이 낳을 결과를 따져 보라고 요구합니다. 보살의 논쟁은 번뇌를 늘리는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고인명과 신인명 사이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이 세친(와수반두)의 『논궤』(Vādavidhi)입니다. 이 책은 산스크리트 원전이 온전히 남아 있지 않고, 디그나가나 웃됴따까라 같은 후대 논사들의 인용을 통해 단편적으로 전해집니다. 그 단편들에 따르면 『논궤』는 논증을 주장·이유·실례의 세 지분으로 구성하고, 추론을 “불가분하게 결합된 대상을, 그 결합을 아는 이가 보는 것”으로 정의했다고 합니다. 올바른 이유가 갖추어야 할 특징에 대한 논의 역시 삼상 이론의 원형으로 평가되곤 합니다. 한편 『논궤』는 지각을 “바로 그 대상으로부터 생긴 인식”으로 정의했는데, 디그나가는 이 정의를 비판하면서 이 책이 세친의 원숙한 견해를 담은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취지의 언급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디그나가는 스승 세대의 성과를 이어받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려 했던 것입니다.
| 비교 항목 | 고인명 (『유가사지론』·『논궤』 무렵까지) | 신인명 (디그나가 이후) |
|---|---|---|
| 관심의 중심 | 논쟁의 절차, 승패, 논자의 자질 | 올바른 앎의 성립 조건 |
| 인식 수단의 지위 | 논증을 이루는 부품의 하나 | 인명 전체의 토대 |
| 인식 수단의 수 | 지각·추론·가르침의 셋이 흔함 | 지각과 추론의 둘 |
| 논증 형식 | 다섯 지분에서 세 지분으로 이행 중 | 세 지분(종·인·유), 삼상으로 이유를 검증 |
| 오류론 | 궤변·패배 등 행동과 태도를 폭넓게 포함 | 종·인·유의 구조적 결함으로 체계화 |
이렇게 보면 디그나가의 혁명은 갑자기 떨어진 번개가 아니라, 『니야야 수트라』와 불교 논쟁 문헌이 수백 년 동안 서로를 다듬어 온 끝에 도달한 하나의 결절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인물이 있습니다. 니야야와 불교 인명이 공유하던 전제, 곧 인식 수단으로 대상을 확립할 수 있다는 전제 자체에 물음표를 던진 나가르주나입니다. 논쟁의 규칙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이 사상가가 그 규칙을 어떻게 뒤흔들었는지가 다음 편의 이야기입니다.
요체. 『유가사지론』의 칠인명은 논쟁의 실천 교본이며, 여기서 인식 수단은 논증의 여덟 부품 가운데 셋으로 놓인다. 논출리는 개별 논쟁의 결과를 먼저 살피라고 요구한다. 세친의 『논궤』는 세 지분과 삼상의 원형을 보여 주는 문턱이며, 디그나가는 이를 이어받아 넘어섰다.
이번 편에서 새로 만난 열두 개의 열쇠말입니다.
낱말이 가리키는 것. 니야야는 열여섯을 든다.
탐구의 출발점. 한 대상에 대해 상반된 판단이 가능한 상태.
한 학파가 확정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교의.
반대 가정의 불합리한 귀결을 보여 판단을 돕는 가설적 추론.
인식 수단과 사택만으로 진리를 확정하려는 논쟁.
궤변·오난·패배처까지 동원해 이기려는 논쟁.
자기 입장의 확립 없이 상대만 공격하는 쟁론.
이유처럼 보이나 이유가 아닌 것. 니야야는 다섯을 든다.
상대의 말을 다른 뜻으로 비틀어 공격하는 것.
겉모양의 유사성·차이성에만 기댄 그릇된 반박.
논쟁자의 패배가 확정되는 조건. 스물두 가지.
나누어 답하는 태도. 테라와다의 자기 호칭이기도 하다.
선택지를 누르면 곧바로 채점됩니다. 답을 고른 뒤 나타나는 해설을 펼쳐 선택지 하나하나의 근거를 확인해 보세요. 마지막 문제는 법학적성시험(LEET) 언어이해 수준의 독해와 추론을 요구합니다.
『니야야 수트라』의 세 가지 논쟁 유형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정답 ③. 파괴론은 쟁론 가운데 ‘반대 주장의 확립’이 빠진 것이며(1.2.3), 여기서 반대 주장은 파괴론자 자신의 입장을 가리킨다(제3장).
① 논의는 인식 수단과 사택으로만 증명하고 비판한다. 궤변과 오난은 쟁론의 수단이다. ② 스승과 제자처럼 서로 시기하지 않는 이들 사이의 진리 탐구는 논의에 대한 설명이다. ④ 쟁론은 “앞서 말한 조건을 갖추되”라고 정의되므로 다섯 지분을 비롯한 논의의 조건을 공유한다. ⑤ 『니야야 수트라』 4.2.50은 쟁론과 파괴론을 싹을 지키는 가시 울타리에 비유하며 오히려 정당화한다.
다음 (가)~(다)에서 을이 쓴 궤변의 종류를 바르게 짝지은 것은?
(가) 갑: “저 상인은 새 수레를 샀구려.” 을: “아홉 대라니, 한 대뿐이던데?” (산스크리트어 nava는 ‘새’와 ‘아홉’을 모두 뜻한다.)
(나) 갑: “저 마을이 잔치로 들썩이는구려.” 을: “마을은 흙과 집일 뿐, 스스로 들썩일 수는 없소.”
(다) 병: “저 사람은 학자 집안 출신이니 글을 잘 쓸 법하지요.” 을: “학자 집안 출신이면 글을 잘 쓴다니, 그 집안의 갓난아기도 글을 잘 쓰겠구려.”
정답 ①.
(가) 한 낱말(nava)이 지닌 여러 뜻 가운데 화자가 의도하지 않은 뜻을 골라 공격했으므로 말의 곡해다. (나) ‘마을이 들썩인다’는 마을 사람들이 들썩인다는 환유적 표현인데,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 반박했으므로 비유의 곡해다. (다) 병은 ‘학자 집안 출신이라는 조건이 글솜씨에 유리하다’는 제한된 뜻으로 말했는데, 을은 이를 ‘그 집안 출신이면 누구나 예외 없이 글을 잘 쓴다’는 무제한의 일반 명제로 부풀려 반례를 들었으므로 일반화의 곡해다. 본문의 바라문 사례와 같은 구조다.
(다)를 비유의 곡해로 착각하기 쉬운데, 병의 말에는 비유나 환유가 없다. 문제는 말의 적용 범위를 부당하게 넓힌 데 있다.
초기 불교의 ‘네 가지 대답 방식’에 따를 때, (가)~(라)의 물음에 적합한 대답 방식을 바르게 짝지은 것은?
(가) 태어난 모든 중생은 반드시 죽습니까?
(나) 죽은 이는 모두 다시 태어납니까?
(다) 인간은 뛰어난 존재입니까, 열등한 존재입니까?
(라) 세계는 영원합니까?
정답 ①. 이 짝은 『구사론』 등 아비달마 문헌이 네 가지 대답을 설명할 때 드는 고전적 예와 같다.
(가) 태어난 것은 예외 없이 죽으므로 “그렇다”고 단정해 답할 수 있다. (나) 죽은 이 가운데 번뇌가 남은 이는 다시 태어나고 번뇌를 다한 이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므로 나누어 답해야 한다. (다) ‘뛰어나다, 열등하다’는 비교의 기준이 정해져야 답할 수 있는 말이다. 천신에 비하면 열등하고 축생에 비하면 뛰어나므로, 먼저 “무엇에 견주어 묻는가?”라고 되물어 기준을 확정해야 한다. 기준이 정해진 뒤에는 나누어 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물음의 결함은 대상의 부류가 섞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비교 기준이 빠져 있는 데 있다는 점에서 (나)와 구별된다. (라) 세계의 영원 여부는 붓다가 답하지 않은 무기(無記)의 물음으로, 제쳐 두는 대답에 해당한다.
다음은 『까타왓투』의 형식을 본떠 만든 문답이다. 이에 대한 분석으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있는 대로 고른 것은?
A: 아라한은 아라한과(果)에서 물러날 수 있습니까? — B: 그렇습니다.
A: 아라한과에서 물러난 이에게 모든 번뇌가 끊어져 있습니까? — B: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A: 논박을 인정하시오.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끊은 이이므로, 아라한과에서 물러날 수 있다면 번뇌가 끊어진 채로 물러난다고 말해야 합니다. 앞의 것은 말해야 하고 뒤의 것은 말해서는 안 된다고 그대가 말한 것은 그릇됩니다.
ㄱ. A의 논박은 B가 긍정한 명제와 부정한 명제가 함께 유지될 수 없음을 보이는 방식이다.
ㄴ. A의 논박이 성립하려면, 아라한이 모든 번뇌를 끊은 이라는 점을 B도 받아들이고 있어야 한다.
ㄷ. A의 논박은 양측이 공유하는 경험적 실례를 제시하여 B의 주장이 그 실례와 어긋남을 보인다.
ㄹ. B가 두 번째 물음에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면, 제시된 형태의 논박은 이 단계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정답 ④. 참고로 아라한이 물러날 수 있는가는 실제로 『까타왓투』가 다루는 쟁점 가운데 하나다. 여기서는 형식만 본떠 단순화했다.
ㄱ (옳음). B는 ‘아라한은 물러날 수 있다’(P)를 긍정하고 ‘물러난 이에게 모든 번뇌가 끊어져 있다’(Q)를 부정했다. A는 P라면 Q여야 한다는 연결을 근거로 두 대답이 함께 유지될 수 없음을 보인다. 이것이 본문에서 분해한 『까타왓투』 논박의 구조다.
ㄴ (옳음). 이 논박은 ‘P라면 Q’라는 연결에 기대고 있고, 그 연결의 근거는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끊은 이’라는 명제다. B가 이 명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B는 연결 자체를 부정할 수 있으므로 논박이 성립하지 않는다. 본문이 지적한 이 논법의 한계다.
ㄷ (틀림). 이 문답에는 아궁이나 그릇 같은 경험적 실례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본문이 말했듯 『까타왓투』의 논박은 실례가 아니라 상대 대답들 사이의 정합성을 문제 삼는다. 실례를 요구하는 것은 오지작법이나 삼지작법의 특징이다.
ㄹ (옳음). 두 번째 물음에도 긍정했다면 B는 P와 Q를 모두 긍정한 것이 되어, ‘P를 긍정하면서 Q를 부정한다’는 불일치가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이 형태의 논박은 이 단계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B의 입장이 옳다는 뜻은 아니다. 번뇌가 끊어진 채로 물러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두고 다른 논박이 이어질 수 있다.
[5]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가) 『니야야 수트라』는 논쟁을 세 유형으로 나눈다. 논의는 양측이 각각 주장과 반대 주장을 받아들여 다투되, 인식 수단과 사택으로써 증명하고 비판하며, 정설에 어긋나지 않고 다섯 지분을 갖춘 논쟁이다. 쟁론은 이 조건을 갖추되 궤변·오난·패배처로써도 증명하고 비판하는 논쟁이고, 파괴론은 쟁론 가운데 반대 주장의 확립이 빠진 것이다. 여기서 반대 주장이란 파괴론자 자신의 입장을 가리킨다. 이는 파괴론자에게 입장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입장을 논증으로 세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 유형은 목적에서도 구별된다. 주석가들에 따르면 논의는 진리의 확정을 목적으로 서로 시기하지 않는 이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반면, 쟁론과 파괴론은 승리를 목적으로 한다. 그럼에도 『니야야 수트라』는 후자를 배척하지 않고, 쟁론과 파괴론이 진리의 확정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 하며 이를 싹을 지키려고 가시 돋친 가지로 울타리를 두르는 일에 비유한다. 즉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논쟁의 정당성은 승리 그 자체에서 오지 않고, 이미 얻은 진리를 그것을 공격하는 이들로부터 지킨다는 상위의 목적에서 파생된다.
(나) 『유가사지론』은 논쟁에 나서기 전에 먼저 살필 것을 요구한다. 그 논쟁이 자신과 남에게 이익이 되는지, 청중이 공정하고 지혜로운지, 자신이 논쟁에 능숙한지를 살펴, 그렇지 않다면 논쟁에 나서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이는 논쟁의 정당성을 그 논쟁이 봉사하는 목적의 종류보다는 개별 논쟁이 낳을 결과에 비추어 판단하는 태도이다. 또한 이 문헌은 논쟁의 패배를 말을 버림, 말이 꺾임, 말의 허물로 나누는데, 논증 형식의 결함뿐 아니라 논쟁자의 태도와 행동까지 패배의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니야야의 패배처 분류와 통하는 면이 있다.
윗글을 바탕으로 <보기>를 평가한 것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어느 왕의 궁정에서 공개 논쟁이 열렸다. 논사 갑은 논사 을이 세운 ‘자아는 상주한다’는 주장을 여러 논거로 반박하면서 을의 말꼬리를 잡는 방식도 서슴지 않았으나, 자신의 입장은 끝내 논증으로 세우지 않았다. 을은 갑의 반박 가운데 비유적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공격했다. 갑은 을이 진리 탐구보다 명성을 위해 논쟁에 나섰다고 여겼으며, 궁정의 청중이 을에게 기울어 있다는 사실을 논쟁 전부터 알고 있었다.
정답 ⑤. 이 문항은 두 관점이 논쟁의 정당성을 어디에서 찾는지를 정확히 구별하는지, 그리고 정의의 조건을 사례에 빈틈없이 적용하는지를 묻는다.
⑤ (적절하지 않음). (가)의 둘째 문단은 쟁론과 파괴론의 목적이 승리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정당성은 “승리 그 자체에서 오지 않고” 진리를 지킨다는 상위의 목적에서 파생된다고 명시한다. 목적(승리)과 정당화 근거(진리의 보호)를 혼동한 진술이다. (가)와 (나)가 대비되는 것은 맞지만, 대비의 축은 ‘봉사하는 목적의 종류’(가)와 ‘개별 논쟁의 결과’(나)이지 ‘승리 자체’와 ‘결과’가 아니다.
① (적절). 갑은 말꼬리를 잡는 방식, 곧 궤변을 썼으므로 쟁론의 조건을 충족하고, 자신의 입장을 논증으로 세우지 않았으므로 파괴론에 해당한다. 또한 (가)는 파괴론자에게 입장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세우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밝힌다. 갑이 을의 주장을 궤변 없이 반박만 했다면 쟁론의 조건을 충족하는지부터 따져야 했을 것이다. <보기>가 굳이 “말꼬리를 잡는 방식도 서슴지 않았다”고 쓴 까닭이다.
② (적절). 비유적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 공격하는 것은 궤변의 일종(비유의 곡해)이다. (가)에 따르면 궤변은 쟁론의 수단이며, 논의는 인식 수단과 사택만을 쓴다.
③ (적절). (가)의 논리에 따르면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논쟁의 정당성은 진리를 공격하는 이들로부터 진리를 지킨다는 상위 목적에서 온다. 갑이 을을 명성을 위해 논쟁에 나선 이로 여겼다는 사정은 이 정당화가 적용될 여지를 보여 주지만, 정당화의 근거 자체는 승리가 아니다.
④ (적절). (나)는 청중이 공정하고 지혜로운지를 먼저 살피고, 그렇지 않다면 논쟁에 나서지 않는 것이 옳다고 본다. 갑은 청중이 을에게 기울어 있음을 미리 알았으므로, (나)의 관점에서는 그 선택을 문제 삼을 수 있다.
나가르주나의 『회쟁론』과 『광파론』을 읽습니다. 인식 수단은 무엇으로 확립되는가, 등불은 정말 스스로를 비추는가, “나에게는 어떤 주장도 없다”는 말은 파괴론인가. 그리고 『니야야 수트라』 제2권이 이런 도전에 어떻게 응답하는지를 함께 살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