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인명학 『연기와 불』 धूमाग्निः
पर्वतो वह्निमान् धूमात् parvato vahnimān dhūmāt — 저 산에 불이 있다, 연기가 있으므로
제1편

저울을 드는 자들

인명(因明)이란 무엇이며, 누가 무엇을 두고 다투었는가

읽는 시간 약 45분 본문 일곱 장과 연습문제 다섯

이 편을 마치면

  1. ‘인명’과 ‘프라마나’라는 두 이름이 무엇을 가리키며, 왜 인도의 논리학이 곧 인식론이기도 한지 설명할 수 있다.
  2. 니야야 학파와 불교 인명이 인식 수단의 수, 인식 주체, 수단과 결과의 관계를 두고 어떻게 갈라서는지 큰 그림으로 말할 수 있다.
  3. ‘연기 나는 산’ 추론을 주제·증명될 속성·이유·실례로 해부하고, 좋은 이유의 세 조건으로 간단한 논증을 판정할 수 있다.
०
upodghātaḥ

서(序) — 연기 나는 산 앞에서

해 질 무렵 먼 산등성이에서 가느다란 연기 한 줄기가 오르는 것을 본다고 해 봅시다. 불길은 능선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의 망설임 없이 “저 산에 불이 났구나” 하고 압니다.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앎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이 순간은, 그러나 곰곰이 따져 보면 이상한 구석이 많습니다. 우리는 불을 보지 않았습니다. 본 것은 연기뿐입니다. 보지 않은 것을 어떻게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연기와 불 사이의 연결은 누가, 무엇이 보증해 주는 것일까요. 그리고 연기를 본 앎과 불을 짐작한 앎, 그 둘을 이어 붙여 하나의 판단으로 만드는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인도의 사상가들은 바로 이 장면을 두고 천오백 년이 넘도록 논쟁했습니다. 산스크리트 논리학 문헌을 펼치면 거의 어디서나 이 산과 이 연기를 만나게 됩니다. 후대의 정형화된 표현으로는 parvato vahnimān dhūmāt, “산은 불을 가진다, 연기로부터”라는 한 줄이 그것입니다. 서양 논리학 입문서가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로 시작하듯이, 인도 논리학의 입문자는 이 산 앞에 먼저 섭니다. 이 시리즈의 이름을 『연기와 불』로 붙인 것도 그 때문입니다.

고대와 중세 인도에서 논쟁은 서재 안의 사변이 아니라 공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왕의 궁정이나 대사원의 강당에서 학파의 대표들이 맞붙었고, 심판과 청중이 있었으며, 승패에 따라 후원과 명예가 오갔습니다. 패한 논사가 제자들과 함께 이긴 쪽의 가르침으로 귀의했다는 전승도 여러 곳에 남아 있습니다. 당나라의 현장 법사가 인도 유학 말기에 곡녀성(曲女城)에서 열린 대회에서 논제를 내걸었는데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그의 전기에 전합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 ‘어떻게 말해야 이기는가’라는 논쟁술의 물음은 곧 ‘어떻게 알아야 참인가’라는 인식론의 물음으로 깊어졌습니다. 그 결과 인도에는, 논증의 형식만을 다루는 서양 형식논리학과는 결이 다른, 인식과 논증과 논쟁을 하나로 엮는 독특한 학문이 자라났습니다.

이 학문을 불교 전통에서는 인명(因明)이라 부르고, 힌두 정통 학파 가운데 이 분야를 자신의 이름으로 삼은 학파를 니야야(Nyāya)라 부릅니다. 이 시리즈는 불교 인명을 중심에 두고 걷습니다. 나가르주나의 날카로운 회의, 세친의 정리, 디그나가의 혁명, 다르마끼르띠의 완성, 그리고 그것이 티베트에서 수도원의 교과로 뿌리내리는 과정이 큰 줄기입니다. 그러나 이 줄기는 니야야라는 거울 없이는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불교 논사들이 쓴 거의 모든 문장에는 니야야를 향한 반박이 들어 있고, 니야야의 거의 모든 발전에는 불교를 향한 응수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전통을 나란히 놓고, 불교 쪽에 무게를 두되 니야야를 성실하게 분석하는 대조의 구도를 취할 것입니다. 이 첫 편은 그 긴 여정을 위한 지도와 나침반입니다.

१
nāmavyākhyā

이름을 풀다 — 인명, 오명, 그리고 프라마나

‘인명’은 산스크리트어 hetuvidyā हेतुविद्या를 한문으로 옮긴 말입니다. hetu는 ‘움직이게 하다, 촉발하다’라는 뜻의 동사 어근에서 나온 말로, 일상어에서는 원인이나 동기를 뜻하고 논리학에서는 어떤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유, 곧 논증의 근거를 가리킵니다. vidyā는 ‘알다(√vid)’에서 온 말로 앎이나 학문을 뜻합니다. 그러니 인명이란 직역하면 ‘이유에 관한 학문’이고, 조금 풀어 말하면 ‘무엇이 좋은 이유이며 무엇이 나쁜 이유인지를 밝히는 학문’입니다. 한자 因은 인과(因果)의 인이기도 해서 처음 배우는 이들이 곧잘 ‘원인에 대한 학문’으로 오해하곤 하는데, 인명의 인은 무엇보다 논증에서 결론을 끌어내는 근거, 즉 “연기가 있기 때문에”의 “때문에”에 해당하는 자리를 가리킨다는 점을 먼저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대승 불교, 특히 유가행파의 대논서인 『유가사지론』은 보살이 두루 익혀야 할 학문의 영역을 다섯으로 나누었고, 이를 오명(五明)이라 부릅니다. 인명은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분류는 인도에서 티베트와 동아시아로 그대로 전해져서, 티베트에서는 지금도 학식 높은 승려를 가리켜 ‘다섯 학문에 통달한 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습니다.

शब्दविद्या성명聲明
언어·문법의 학
शिल्पकर्मस्थान공교명工巧明
기술·공예·산술
चिकित्साविद्या의방명醫方明
의술과 약학
हेतुविद्या인명因明
이유와 논증의 학
अध्यात्मविद्या내명內明
불교 자체의 교학
그림 1. 오명(五明). 앞의 네 학문은 불교 바깥과 공유하는 학문이고, 내명만이 불교 고유의 교학이다. 인명은 ‘바깥과 공유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대화와 논쟁의 학문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인명이 내명, 곧 불교 고유의 교학과 구별되는 ‘바깥의 학문’으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인명은 붓다의 가르침을 담은 그릇이라기보다, 불교도와 비불교도가 함께 앉아 같은 규칙으로 따질 수 있게 해 주는 공통의 언어였습니다. 『유가사지론』 계통의 설명을 대략 요약하면, 보살이 인명을 익히는 까닭은 남의 그릇된 주장을 논파하고,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드러내며, 아직 믿음이 없는 이들을 이끌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인명은 이렇게 태생부터 대화 상대를 전제한 학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명의 성격은 5~6세기의 디그나가를 기점으로 크게 달라집니다. 그 이전의 인명이 주로 논쟁의 절차와 규칙, 즉 ‘어떻게 논증을 세우고 어떻게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가’에 초점을 두었다면, 디그나가 이후의 인명은 ‘애초에 올바른 앎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몇 가지 경로로 얻어지는가’라는 인식론의 물음을 중심에 놓았습니다. 그래서 현대 학계는 디그나가 이후의 전통을 흔히 ‘불교 논리학·인식론(Buddhist logico-epistemology)’이라 부르고, 인도 원어로는 pramāṇavāda, 곧 ‘프라마나에 관한 학설’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동아시아 전통은 디그나가 이전을 고인명(古因明), 디그나가 이후를 신인명(新因明)이라 나누어 부릅니다. 티베트어로는 이 학문을 ‘체마(tshad ma)’라 하는데, 이는 바로 프라마나의 번역어입니다.

힌두 쪽의 이름도 살펴봅시다. ‘니야야’라는 말은 본래 ‘규칙, 방법, 올바른 절차’를 뜻하며 오늘날에도 인도 여러 언어에서 ‘정의(正義)’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니야야 학파의 가장 오래된 주석가 왓스야야나는 니야야를 “프라마나들로써 대상을 검토하는 것”(pramāṇair arthaparīkṣaṇam)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이 짧은 정의 안에 이미 인도 논리학 전체의 성격이 담겨 있습니다. 논리란 말의 형식을 다루는 일이기 이전에, 인식의 수단을 들고 세계를 검사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한역 불전은 이 학파를 ‘정리파(正理派)’라고 옮겼습니다.

टीका곁풀이 — 인명은 ‘논리학’인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양의 형식논리학은 내용과 무관하게 형식만으로 타당성을 판정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모든 A는 B이다, 모든 C는 A이다, 그러므로 모든 C는 B이다”는 A, B, C에 무엇을 넣든 타당합니다. 인명은 다릅니다. 인명에서 추론은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앎의 사건이고, 그래서 증명하려는 주장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이어야 하며, 논증에는 반드시 양측이 인정하는 경험적 실례(부엌처럼, 병처럼)가 붙어야 합니다. 형식의 타당성보다 ‘이 논증이 이 상대에게 이 상황에서 앎을 산출하는가’가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인명을 ‘논리학’이라 부를 때는 그것이 인식론과 논증론과 논쟁술을 한 몸에 지닌 학문이라는 점을 함께 떠올려야 합니다.

सार

요체. 인명(hetuvidyā)은 ‘이유의 학’이며 오명 가운데 바깥과 공유하는 학문이다. 디그나가를 기점으로 논쟁술 중심의 고인명에서 인식론 중심의 신인명(pramāṇavāda)으로 전환되었고, 그 맞은편에는 ‘프라마나로 대상을 검토하는’ 니야야 학파가 서 있다.

२
pramāṇam

저울과 저울질 — ‘프라마나’라는 열쇠말

이 시리즈에서 가장 자주 만날 낱말 하나를 고르라면 단연 프라마나(pramāṇa, प्रमाण)입니다. 이 말은 접두사 pra-(앞으로, 확실히)와 ‘재다, 측정하다’를 뜻하는 동사 어근 √mā, 그리고 도구를 나타내는 접미사 -ana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문자 그대로는 ‘확실히 재는 도구’, 곧 저울이나 자입니다. 실제로 산스크리트 일상어에서 프라마나는 길이나 무게의 척도, 표준, 나아가 ‘권위’를 뜻하기도 했습니다. “이 문제에서는 그분의 말씀이 프라마나다”라고 하면 ‘그분의 말씀이 기준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인식론의 용어로서 프라마나는 올바른 인식을 얻게 하는 수단, 또는 문맥에 따라 그렇게 얻어진 올바른 인식 자체를 가리킵니다. 한역 불전은 이를 량(量)이라 옮겼는데, 역시 ‘헤아림, 잼’이라는 뜻입니다. 이 저울의 비유를 조금 밀고 나가면 인식이라는 사건을 네 요소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저울질하는 사람, 저울, 저울에 올려지는 물건, 그리고 저울질의 결과로 얻는 눈금이 그것입니다. 산스크리트 인식론은 같은 어근에서 나온 네 낱말로 이 넷을 부릅니다.

산스크리트한역뜻저울의 비유
pramātṛ प्रमातृ능량자(能量者)인식하는 주체저울질하는 사람
pramāṇa प्रमाण량(量), 능량(能量)인식 수단저울
prameya प्रमेय소량(所量)인식 대상저울에 오른 물건
pramiti / pramā प्रमिति량과(量果)결과로서의 올바른 인식읽어 낸 눈금

이 네 요소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서 이미 니야야와 불교가 갈라집니다. 니야야는 인식을 하나의 행위로 봅니다. 나무꾼이 도끼를 들고 나무를 쪼개면 행위자, 도구, 대상, 결과가 뚜렷이 구별되듯이, 인식에서도 지속하는 자아(ātman)가 인식 수단을 써서 대상에 작용하고 그 결과로 올바른 인식이 생긴다고 봅니다. 네 기둥이 저마다 따로 서 있는 구조입니다. 반면 무아를 가르치는 불교는 인식 수단을 쥐고 휘두르는 지속적 주체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디그나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수단과 결과조차 서로 다른 두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하나의 인식이 대상의 모습을 띠고 일어날 때, 그 ‘대상의 모습을 띰’이라는 측면을 수단이라 부르고, 그 인식이 스스로를 아는 측면을 결과라 부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대담한 주장의 속살은 제5편에서 천천히 풀겠지만, 지금은 아래 그림처럼 두 구조의 모양새만 눈에 담아 두시면 됩니다.

니야야 — 네 기둥 주체 ātman · pramātṛ 수단 pramāṇa (도구) 대상 prameya 결과 pramiti 사용 작용 산출 귀속 나무꾼·도끼·나무·쪼개짐의 구조
디그나가 — 한 등불, 두 얼굴 대상의 형상을 띰 = 수단 스스로를 앎 = 결과 하나의 인식을 두 측면에서 기술할 뿐, 별도의 주체는 없다
그림 2. 인식 사건의 두 모형. 왼쪽은 네 요소가 저마다 독립된 니야야의 ‘행위 모형’, 오른쪽은 수단과 결과를 한 인식의 두 측면으로 보는 디그나가의 모형이다.

무엇이 ‘올바른’ 인식인가

저울이 저울 노릇을 하려면 눈금이 정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인식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니야야는 대체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경험을 올바른 인식이라고 보았습니다. 은이 있는 곳에서 은을 보면 올바른 인식이고, 조개껍데기를 보고 은이라고 여기면 그릇된 인식입니다. 대상 쪽에 실재하는 것과 인식 속에 드러나는 것이 들어맞는지가 관건인 셈입니다.

불교의 다르마끼르띠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기준을 세웠습니다. 그의 대표작 『량평석(量評釋, Pramāṇavārttika)』의 인식론 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प्रमाणमविसंवादि ज्ञानम्
pramāṇam avisaṃvādi jñānam
프라마나란 속이지 않는 인식이다.
다르마끼르띠, 『량평석』 제2장 첫머리

‘속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사막의 나그네가 멀리서 물결을 보고 다가갔는데 그것이 신기루였다면, 그 인식은 나그네를 속인 것입니다. 목을 축이려는 목적을 이루게 해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멀리서 불을 보고 다가갔더니 실제로 몸을 데우고 밥을 지을 수 있었다면, 그 인식은 속이지 않은 것입니다. 다르마끼르띠는 대상이 실제로 어떤 효과를 내는 능력, 곧 효과적 작용(arthakriyā)을 우리가 얻게 해 주는지를 인식의 올바름을 가르는 시금석으로 삼았습니다. 이 기준은 ‘있는 그대로와 들어맞음’이라는 니야야식 대응의 기준과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앎을 실천과 목적 달성의 맥락 속에서 바라본다는 점에서 뚜렷한 불교적 색채를 띱니다. 괴로움을 끝내려는 목적을 가진 존재에게 앎은 무엇보다 ‘믿고 발을 내디딜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सार

요체. 프라마나는 ‘재는 도구’, 곧 올바른 인식의 수단이다. 니야야는 주체·수단·대상·결과를 서로 다른 네 기둥으로 세우고, 디그나가는 주체를 지우고 수단과 결과를 한 인식의 두 얼굴로 본다. 다르마끼르띠는 올바름의 기준을 ‘속이지 않음’, 곧 효과적 작용의 획득에서 찾았다.

३
pramāṇasaṃkhyā

몇 개의 저울이 있는가

인도 철학의 학파들을 가르는 가장 간명한 물음 가운데 하나는 “인식 수단은 몇 가지인가”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목록 작성이 아닙니다. 어떤 인식 수단을 인정하느냐는 곧 세계의 어떤 부분을 알 수 있다고 보느냐, 어떤 권위를 믿을 수 있다고 보느냐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니야야 학파의 근본 경전인 『니야야 수트라』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प्रत्यक्षानुमानोपमानशब्दाः प्रमाणानि
pratyakṣa-anumāna-upamāna-śabdāḥ pramāṇāni
지각, 추론, 비유, 말씀이 프라마나들이다.
『니야야 수트라』 1.1.3

첫째 지각(pratyakṣa, 현량 現量)은 감관이 대상과 접촉하여 생기는 앎입니다. 눈앞의 항아리를 보는 것이 그 전형입니다. 둘째 추론(anumāna, 비량 比量)은 이미 알려진 표지를 통해 드러나지 않은 것을 아는 앎으로, 연기로 불을 아는 것이 그 전형입니다. 셋째 비유(upamāna, 비유량 譬喩量)는 조금 낯설 수 있습니다. 니야야의 고전적인 예에 따르면, 도시 사람이 숲 사람에게서 “가바야라는 짐승은 소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말을 듣고 숲에 들어갔다가, 소를 닮은 짐승을 보는 순간 “아, 이것이 가바야로구나” 하고 이름과 대상의 관계를 아는 것이 비유에 의한 앎입니다. 넷째 말씀(śabda, 성언량 聖言量)은 믿을 만한 사람(āpta)의 말로부터 얻는 앎이며, 니야야에게는 베다의 가르침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 목록을 다른 학파들과 나란히 놓아 보면 지형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학파지각추론비유말씀요청
arthāpatti
비인식
anupalabdhi
짜르바까(유물론)
불교(디그나가 이후)
와이셰시까
상키야
니야야
미망사(쁘라바까라파)
미망사(밧따파)·베단따

표 2. 학파별로 인정하는 독립된 인식 수단. 채워진 원은 독립 프라마나로 인정함을 뜻한다. 인정하지 않는 수단도 대개는 다른 수단 안으로 흡수해 설명한다.

왜 불교는 두 개의 저울만 쓰는가

디그나가는 인식 수단을 지각과 추론 둘로 한정했습니다. 그 근거가 흥미롭습니다. 그는 수단의 수를 대상의 종류에서 끌어냈습니다. 인식의 대상은 오직 두 종류뿐이며, 그러니 인식 수단도 둘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자상(自相, svalakṣaṇa), 곧 지금 여기서 타오르는 바로 이 불, 다른 어떤 것과도 공유되지 않으며 말로는 결코 온전히 담을 수 없는 개별적 실재입니다. 다른 하나는 공상(共相, sāmānyalakṣaṇa), 곧 ‘불’이라는 말과 개념이 가리키는, 여러 개체에 두루 적용되는 일반적 특징입니다. 지각은 자상만을, 추론은 공상만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불교 인명의 관점에서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은 자상뿐이며, 공상은 마음이 지어낸 개념적 구성물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수단들은 어떻게 될까요. 비유는 지각과 추론, 또는 들은 말에 대한 이해가 결합된 것으로 풀어 버리면 됩니다. 말씀, 곧 신뢰할 만한 이의 말로부터 얻는 앎은 디그나가에게 일종의 추론으로 편입됩니다. “이분은 믿을 만한 분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은 참일 것이다”라는 추론의 구조를 지닌다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중요한 함의가 있습니다. 불교 인명은 원칙적으로 경전의 권위조차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추론의 검증대에 올린다는 것입니다. 베다를 스스로 권위 있는 계시로 받드는 정통 학파들과 가장 깊이 갈라서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टीका곁풀이 — 삼플라와와 뱌와스타

인식 수단의 수를 둘러싼 논쟁은 또 하나의 대립으로 이어집니다. 니야야는 하나의 대상이 여러 인식 수단에 의해 거듭 알려질 수 있다고 봅니다. 멀리서 연기를 보고 불을 추론한 뒤 가까이 가서 그 불을 직접 보면, 같은 불이 추론과 지각이라는 두 저울에 차례로 올라간 것입니다. 이를 프라마나의 합류(pramāṇa-saṃplava, 삼플라와)라 합니다. 불교는 이를 거부하고 프라마나의 분담(pramāṇa-vyavasthā, 뱌와스타)을 주장합니다. 각 수단은 저마다 고유한 대상의 영역을 가지므로, 추론이 파악한 ‘불 일반’과 지각이 파악한 ‘이 불’은 엄밀히 말해 같은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대립은 이번 편 마지막 연습문제에서 다시 만납니다.

सार

요체. 니야야는 지각·추론·비유·말씀의 네 프라마나를 세우고, 디그나가는 대상이 자상과 공상 둘뿐이라는 근거로 지각과 추론만을 남긴다. 이 차이는 경전 권위의 지위, 그리고 한 대상을 여러 수단이 알 수 있느냐(삼플라와)와 수단마다 대상이 나뉘느냐(뱌와스타)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४
anumānasya śarīram

산 위의 연기 — 추론의 해부

추론을 뜻하는 anumāna는 ‘뒤따라’를 뜻하는 anu-와 ‘앎, 잼’을 뜻하는 māna가 합쳐진 말입니다. 문자 그대로는 ‘뒤따르는 앎’입니다. 무엇을 뒤따른다는 것일까요. 먼저 지각 등을 통해 어떤 표지가 알려지고, 그 앎을 뒤따라 표지를 지닌 대상에 대한 앎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연기를 먼저 보고, 그 뒤를 따라 불을 아는 것이지요. 한역의 ‘비량(比量)’은 이미 아는 것에 견주어(比) 헤아린다(量)는 뜻으로 같은 구조를 다른 각도에서 포착한 번역입니다.

이제 연기 나는 산의 추론을 해부대에 올려 봅시다. 아래 문장에서 밑줄 친 부분이나 아래의 단추를 누르면 각 부분의 이름과 역할이 풀이됩니다. 인도 논리학의 용어는 처음에는 생소하지만, 이 다섯 자리만 익혀 두면 앞으로 만날 모든 논증을 같은 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저 산에는 불이 있다. 연기가 있기 때문이다.
연기가 있는 곳에는 어디든 불이 있다 — 아궁이처럼.

추론의 다섯 자리

문장의 밑줄 친 부분이나 위의 단추를 눌러 보세요. 각 부분의 산스크리트 이름, 한역 술어, 그리고 그 자리가 짊어진 조건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해부해 보면 이 추론은 두 개의 기둥 위에 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기둥은 “저 산에 연기가 있다”는 사실, 즉 이유가 주제 위에 실제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종법성(宗法性, pakṣadharmatā)이라 합니다. 둘째 기둥은 “연기가 있는 곳에는 어디든 불이 있다”는 불변의 결합, 곧 편충(遍充, vyāpti)입니다. 편충이라는 한역은 ‘두루 채운다’는 뜻인데, 불이 연기를 두루 덮고 있어서 연기가 가는 곳이라면 불이 빠짐없이 따라간다는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관계에는 방향이 있다는 점에 주의하십시오. 연기가 있는 곳에는 불이 있지만, 불이 있는 곳에 반드시 연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도 논사들이 즐겨 드는 예는 벌겋게 달군 쇠구슬입니다. 그 안에는 불이 있지만 연기는 없습니다.

첫째 기둥은 대개 지각으로 확인됩니다. 눈으로 연기를 보면 그만입니다. 문제는 둘째 기둥입니다. 우리가 본 연기와 불의 사례는 유한한데, 어떻게 “어디든, 언제든”이라는 보편적 결합을 알 수 있을까요. 수천 번 함께 보았다고 해서 다음번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것이 인도 논리학의 가장 깊은 난제이고, 니야야와 불교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답한 물음입니다. 니야야는 대체로 반복된 관찰과 반례의 부재, 그리고 보편자(‘연기성’, ‘불성’)들 사이의 실재적 관계에 기대어 편충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다르마끼르띠는 보편자의 실재를 거부하는 대신, 편충이 오직 인과 관계나 본성의 동일성이라는 실재적 결합에서만 보증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논쟁은 제8편과 제9편의 주제입니다. 지금은 인도 논리학사 전체를 ‘편충을 무엇이 보증하는가’를 둘러싼 긴 대화로 읽어도 좋다는 점만 기억해 두면 충분합니다.

다섯 걸음, 세 걸음, 두 걸음

같은 추론이라도 남 앞에서 말로 펼칠 때는 일정한 형식을 갖춥니다. 인도 논리학은 스스로 알기 위한 추론(svārthānumāna, 위자비량 爲自比量)과 남을 설득하기 위해 말로 표현한 추론(parārthānumāna, 위타비량 爲他比量)을 구별합니다. 형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후자입니다. 그런데 이 형식을 몇 걸음으로 짤 것인가를 두고도 전통이 갈립니다. 아래의 단추로 세 가지 형식을 바꾸어 보십시오.

    니야야의 오지작법(五支作法)은 주장에서 시작해 이유와 실례를 거쳐 그 실례를 지금의 주제에 되돌려 적용하고 결론으로 매듭짓습니다. 첫 걸음과 마지막 걸음이 같은 문장을 되풀이하는 듯 보이지만, 니야야는 둘의 지위가 다르다고 봅니다. 주장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제안이고, 결론은 증명을 거쳐 확정된 앎입니다. 청중 앞에서 한 걸음씩 설득해 가는 논쟁의 현장을 생각하면 이 다섯 걸음은 꽤 자연스럽습니다.

    디그나가는 적용과 결론이 논리적으로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 군더더기라 보고 잘라 냈습니다. 그리하여 종(宗)·인(因)·유(喩)의 삼지작법(三支作法)이 불교 인명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대신 실례의 자리에는 두 가지가 들어갑니다. “연기가 있는 곳엔 불이 있다, 아궁이처럼”이라는 긍정의 실례(동법유 同法喩)와 “불이 없는 곳엔 연기도 없다, 호수처럼”이라는 부정의 실례(이법유 異法喩)입니다. 다르마끼르띠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장조차 논증의 필수 요소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증명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는 이유와 결합 관계를 제시하면 저절로 드러나므로, 편충과 종법성 두 가지만 밝히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섯 걸음이 세 걸음으로, 다시 두 걸음으로 줄어드는 과정은 인도 논리학이 ‘설득의 연출’에서 ‘앎의 뼈대’로 초점을 옮겨 간 역사를 압축해 보여 줍니다.

    टीका곁풀이 — 아리스토텔레스와 나란히 놓으면

    다르마끼르띠의 두 걸음은 “연기 있는 모든 곳은 불 있는 곳이다(대전제), 저 산은 연기 있는 곳이다(소전제)”로 옮기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언삼단논법과 거의 겹쳐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인도 논리학은 대전제 옆에 반드시 아궁이라는 구체적 실례를 요구합니다. 보편적 결합이 적어도 한 번은 경험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요구, 즉 연역의 형식 속에 귀납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인명의 특징입니다.

    सार

    요체. 추론은 주제·증명될 속성·이유·불변의 결합·실례의 다섯 자리로 해부된다. 그 뼈대는 ‘이유가 주제에 있음’(종법성)과 ‘이유가 있는 곳엔 증명될 속성이 있음’(편충)의 두 기둥이다. 말로 표현하는 형식은 니야야의 다섯 걸음에서 디그나가의 세 걸음, 다르마끼르띠의 두 걸음으로 압축되었다.

    ५
    trairūpyam

    좋은 이유의 세 얼굴 — 인의 삼상 맛보기

    그렇다면 어떤 이유가 좋은 이유일까요. 디그나가는 올바른 이유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특징을 정식화했습니다. 이를 인의 삼상(因三相, trairūpya)이라 합니다. 불교 인명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이론이므로 제6편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겠지만, 지금 그 윤곽을 잡아 두면 앞으로의 모든 논의가 한결 쉬워집니다. 설명을 위해 인명 문헌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예를 가져오겠습니다. “소리는 무상하다.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병(甁)처럼.” 이 논증은 소리가 영원한 브라흐만의 현현이라거나 베다의 음성은 상주한다고 보는 미망사 학파를 겨냥한 불교의 논증으로 유명합니다.

    삼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두 개의 무리를 떠올려야 합니다. 증명하려는 속성(여기서는 ‘무상함’)을 가진 것으로 이미 양측이 인정하는 것들의 무리를 동품(同品, sapakṣa)이라 하고, 그 속성을 갖지 않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들의 무리를 이품(異品, vipakṣa)이라 합니다. 이 논증에서 동품은 병, 옷, 번개처럼 무상한 것들이고, 이품은 허공처럼 상주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입니다. 주제인 소리는 아직 어느 쪽인지 결정되지 않은 채 두 무리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좋은 이유란 이 미결정의 소리를 동품 쪽으로 확실히 끌어당기는 표지입니다. 그러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제1상 변시종법성(遍是宗法性, pakṣadharmatva)은 이유가 주제 전체에 빠짐없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모든 소리가 실제로 만들어진 것이어야 합니다. 제2상 동품정유성(同品定有性, sapakṣe sattvam)은 이유가 동품에 확실히 있어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무상한 것 가운데 만들어진 것이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합니다. 병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제3상 이품변무성(異品遍無性, vipakṣe ’sattvam)은 이유가 이품에는 전혀 없어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상주하는 것 가운데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제2상은 ‘적어도 일부’만을 요구하지만 제3상은 ‘예외 없이 전무’를 요구한다는 비대칭에 주목하십시오. 이 비대칭이야말로 편충의 보편성을 담보하는 장치입니다.

    아래의 판정기에서 여러 이유를 바꾸어 넣어 보십시오. 오른쪽 그림의 세 원은 주제(소리), 동품(무상한 것들), 이품(상주하는 것들)이고, 황색으로 채워진 부분은 그 무리 가운데 이유가 미치는 범위입니다.

    주장: “소리는 무상하다.”

    아래에서 이유를 하나 고르면 세 조건의 충족 여부가 판정됩니다.

      주제 소리 동품 병·옷·번개 이품 허공 등
      이유를 골라 보세요.

      판정기를 몇 번 눌러 보면 삼상이 각기 다른 종류의 실패를 걸러 내는 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1상이 무너진 이유는 아예 주제 위에 발을 딛지 못한 이유여서 ‘성립하지 않는 이유’(불성 不成)라 불립니다. 제3상이 무너진 이유는 결론 쪽으로도, 그 반대쪽으로도 끌어당길 수 있어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부정(不定)의 이유’가 됩니다. 제2상과 제3상이 함께 무너져 이유가 동품엔 없고 이품에만 있다면, 그 이유는 오히려 주장의 정반대를 증명해 버리는 ‘상위(相違)의 이유’가 됩니다. 한편 니야야 쪽에서도 좋은 이유의 조건을 따졌는데, 후대의 니야야 문헌에서는 삼상에 해당하는 조건에 더해 ‘주장이 다른 인식 수단에 의해 반박되지 않을 것’과 ‘대등한 힘을 가진 반대 논증이 없을 것’을 덧붙인 다섯 조건(pañcarūpya)이 거론됩니다. 불교가 이유 자체의 구조에서 타당성을 찾는다면, 니야야는 논증이 놓인 인식 상황 전체를 고려하려 한다고 대비해 볼 수 있습니다.

      सार

      요체. 좋은 이유는 ① 주제 전체에 있고 ② 동품에 적어도 일부 있으며 ③ 이품에는 전혀 없어야 한다. 제1상의 실패는 불성, 제3상의 실패는 부정, 제2·3상의 동시 실패는 상위를 낳는다.

      ६
      vivādasya mūlam

      두 세계관의 격돌 — 그들은 왜 싸웠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차이들, 곧 인식 수단의 수, 수단과 결과의 관계, 올바름의 기준, 논증의 형식은 저마다 따로 떨어진 기술적 쟁점이 아닙니다. 그 밑바닥에는 세계와 자아에 대한 두 개의 전혀 다른 그림이 놓여 있습니다. 니야야는 인도 철학에서 가장 철저한 실재론의 편에 섭니다. 지속하는 자아가 있고, 부분들과 구별되는 ‘전체’로서의 사물이 있으며, 여러 개체에 공통된 보편자가 실재하고, 세계를 설계하고 업의 과보를 배분하는 신(Īśvara)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올바른 인식 수단을 통해 알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니야야 수트라』의 첫 경문은 프라마나를 필두로 한 열여섯 범주를 올바르게 알면 최고선, 곧 해탈에 이른다고 선언합니다. 니야야에게 논리학은 그 자체로 해탈의 길이었습니다.

      불교 인명은 이 그림의 거의 모든 요소를 해체하려 했습니다. 지속하는 자아 대신 찰나마다 생멸하는 인식의 흐름이 있고, 전체 대신 부분들의 모임이 있으며, 보편자는 개념이 만든 구성물이고, 창조주는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해체의 작업을 불교는 니야야와 같은 도구, 곧 프라마나를 들고 수행했습니다. 디그나가는 인식론의 대저 『집량론(集量論, Pramāṇasamuccaya)』을 다음과 같은 귀경게로 시작합니다.

      प्रमाणभूताय जगद्धितैषिणे
      प्रणम्य शास्त्रे सुगताय तायिने
      pramāṇabhūtāya jagaddhitaiṣiṇe / praṇamya śāstre sugatāya tāyine
      프라마나가 되신 분, 세간의 이익을 바라시는 분,
      스승이시며 선서이시며 구호자이신 분께 예경하고 …
      디그나가, 『집량론』 제1장 제1게 전반

      붓다를 ‘프라마나가 되신 분’(pramāṇabhūta)이라 부르는 이 첫 구절은 불교 인명의 자기 이해를 압축합니다. 붓다는 올바른 인식 그 자체를 몸으로 이룬 분이며, 인명은 그 인식을 우리가 스스로 검증하고 따라 걸을 수 있도록 길을 닦는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다르마끼르띠는 『량평석』의 한 장 전체를 이 구절의 주석에 바쳐, 붓다의 권위가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이성적 검토를 통해 확립될 수 있음을 논증하려 했습니다. 두 전통을 나란히 놓으면 대립의 지형이 선명해집니다.

      न्याय니야야

      인식 주체
      지속하는 자아가 실재하며 인식의 담지자다.
      대상 세계
      실체, 부분과 구별되는 전체, 보편자가 모두 실재한다.
      인식 수단
      지각·추론·비유·말씀의 넷. 한 대상을 여러 수단이 알 수 있다(삼플라와).
      수단과 결과
      도구와 산물로서 서로 구별된다.
      신
      세계의 작자인 신을 추론으로 증명할 수 있다.
      논리학의 목적
      열여섯 범주의 올바른 앎을 통한 해탈.

      हेतुविद्या불교 인명

      인식 주체
      지속하는 자아는 없다. 찰나적 인식의 흐름만 있다.
      대상 세계
      실재하는 것은 찰나적 개별자(자상)뿐, 보편자는 개념적 구성이다.
      인식 수단
      지각과 추론의 둘. 수단마다 대상이 나뉜다(뱌와스타).
      수단과 결과
      한 인식의 두 측면일 뿐 별개의 사건이 아니다.
      신
      창조주 논증은 성립하지 않는다.
      논리학의 목적
      ‘프라마나가 되신 분’의 가르침을 이성으로 검증하고 번뇌를 끊는 방편.

      저울 자체를 의심한 사람 — 나가르주나

      이 대립의 지도 위에 한 사람을 더 올려놓아야 합니다. 2~3세기의 중관 사상가 나가르주나(용수)입니다. 그는 니야야와 불교 인명 어느 한쪽 편에서 싸운 것이 아니라, 두 전통이 공유하는 전제, 곧 ‘프라마나로 대상을 확립할 수 있다’는 전제 자체를 겨누었습니다. 『회쟁론(廻諍論, Vigrahavyāvartanī)』에서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यदि च प्रमाणतस्ते तेषां तेषां प्रसिद्धिरर्थानाम् ।
      तेषां पुनः प्रसिद्धिं ब्रूहि कथं ते प्रमाणानाम् ॥
      yadi ca pramāṇatas te teṣāṃ teṣāṃ prasiddhir arthānām / teṣāṃ punaḥ prasiddhiṃ brūhi kathaṃ te pramāṇānām
      만일 그대에게 이런저런 대상들이 프라마나에 의해 성립한다면,
      그 프라마나들은 또 어떻게 성립하는지 말해 보라.
      나가르주나, 『회쟁론』 제31게

      저울로 물건을 재는데, 그 저울이 정확하다는 것은 무엇으로 재는가. 다른 저울로 잰다면 그 저울은 또 무엇으로 재는가. 끝없는 퇴행에 빠집니다. 저울은 스스로를 보증한다고 말한다면, 왜 저울만 예외인가를 설명해야 합니다. 니야야는 등불이 스스로를 비추면서 다른 것도 비추듯 프라마나도 그렇다고 답하려 했지만, 나가르주나는 등불 안에는 애초에 어둠이 없으니 등불이 ‘자기를 비춘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반박합니다. 결국 프라마나와 대상은 서로에게 기대어서만 성립하는 것, 곧 자성 없이 연기(緣起)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광파론(廣破論, Vaidalyaprakaraṇa)』은 니야야의 열여섯 범주를 하나하나 무너뜨리는 작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가르주나는 이렇게 인명이라는 건물의 바깥에서, 아니 그 주춧돌 아래에서 질문을 던진 사람입니다. 후대의 인도와 티베트 사상가들이 ‘중관의 공(空)과 인명의 량(量)을 어떻게 한자리에 앉힐 것인가’를 두고 고심한 것도 이 때문이며, 그 고심은 이 시리즈의 제3편과 제12편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सार

      요체. 니야야는 자아·전체·보편자·신이 실재하는 세계를 프라마나로 확립하려 했고, 불교 인명은 같은 도구로 그 세계를 해체하며 ‘프라마나가 되신’ 붓다의 가르침을 검증하려 했다. 나가르주나는 그 도구 자체의 자립성을 의심함으로써 두 전통 모두에 질문을 남겼다.

      ७
      paramparā

      천오백 년의 계보 — 한눈에 보는 연표

      인도 사상가들의 연대는 대부분 추정에 기대고 있고 학자들 사이에 수십 년에서 백 년 이상 차이가 나는 경우도 흔합니다. 아래 연표의 세기 구분은 대략적인 위치를 잡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세 갈래의 흐름이 서로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특히 한 전통의 큰 도약이 거의 언제나 다른 전통의 도전에 대한 응답이었다는 점, 예컨대 디그나가 바로 뒤에 그를 비판한 웃됴따까라가 오고, 우다야나의 불교 비판과 라뜨나끼르띠의 응수가 같은 시대에 맞부딪친다는 점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시기
      니야야
      인도 불교
      동아시아·티베트
      ~2세기
      『니야야 수트라』전승상 저자 악샤파다 가우따마. 층위를 두고 정리됨
      2~3세기
      나가르주나『회쟁론』『광파론』으로 프라마나 비판
      4~5세기
      왓스야야나『니야야 바샤』, 최초의 주석
      무착·세친『유가사지론』의 인명 논의, 세친 『논궤』 — 고인명의 정리
      5~6세기
      디그나가『집량론』『인명정리문론』 — 신인명의 출발. 제자 샹까라스와민 『인명입정리론』
      6~7세기
      웃됴따까라『니야야 와르띠까』 — 디그나가 정면 비판
      다르마끼르띠『량평석』『량결택』『정리일적론』 등 — 불교 인식논리학의 완성
      현장·규기·원효647년·649년 『입정리론』『정리문론』 한역. 규기 『인명대소』, 원효 『판비량론』(671)
      8세기
      다르못따라, 샨따락쉬따, 까말라쉴라주석 전통과 중관·인명의 종합
      샨따락쉬따 입장(入藏)티베트에 인도 불교 학문 전래
      9~10세기
      자얀따 밧따, 와짜스빠띠 미슈라불교 비판의 체계화
      10~11세기
      우다야나불교 무아설 비판과 신 존재 논증
      즈냐나쉬리미뜨라, 라뜨나끼르띠찰나멸 논증으로 응수 — 인도 불교 인명의 마지막 전성기
      응옥 로댄셰랍(1059–1109) 인명 논서 번역
      12~13세기
      목샤까라굽따『따르까바샤』 — 입문서
      차파 최끼셍게, 사꺄 빤디따섭류학의 토대, 『량리보장론』
      14~16세기
      강게샤, 라구나타『땃뜨와찐따마니』 — 신니야야(Navya-Nyāya)의 기술 언어
      쫑카빠·걜찹제겔룩파 인명 교과와 논쟁 수행의 확립
      니야야인도 불교동아시아·티베트

      연표에서 드러나듯, 인도 땅에서 불교 인명의 흐름은 12세기 무렵 인도 불교의 쇠퇴와 함께 사실상 끊깁니다. 그러나 니야야는 그 뒤로도 계속 발전하여 14세기 강게샤에 이르러 ‘신니야야’라는, 극도로 정밀한 기술 언어를 갖춘 논리학을 탄생시킵니다. 그 신니야야가 여전히 불교와의 오랜 논쟁에서 다듬어진 개념들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두 전통의 대화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한편 불교 인명은 티베트로 건너가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전통이 되었습니다. 티베트 사원의 마당에서 손뼉을 치며 문답하는 승려들의 논쟁 수행은 다르마끼르띠의 논리를 몸으로 익히는 방식입니다. 동아시아에서는 현장이 들여온 디그나가 계통의 인명이 규기의 주석과 신라 원효의 『판비량론』으로 이어졌는데, 원효는 이 책에서 현장의 논증 가운데 하나를 인명의 규칙으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불교가 인명 전통의 한 갈래를 직접 일구었다는 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이제 여정의 채비는 끝났습니다. 다음 편부터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니야야 수트라』의 논쟁술과 초기 불교의 논쟁 문헌에서 출발합니다. 인명이 아직 ‘말로 이기는 법’이던 시절의 모습을 보아 두어야, 디그나가가 무엇을 뒤집었는지가 제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연기 나는 산은 계속 우리 앞에 서 있을 것이고, 편이 거듭될수록 그 산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조금씩 달라질 것입니다.

      ❖
      śabdakośaḥ

      용어 두루마리

      이번 편에서 새로 만난 열두 개의 열쇠말입니다. 다음 편을 읽기 전에 한 번 더 훑어보시면 좋습니다.

      हेतुविद्याhetuvidyā인명(因明)

      이유와 논증의 학. 오명의 하나.

      प्रमाणpramāṇa량(量)

      올바른 인식의 수단, 또는 그 올바른 인식.

      प्रमेयprameya소량(所量)

      인식 수단으로 헤아려지는 대상.

      प्रत्यक्षpratyakṣa현량(現量)

      지각. 불교에선 자상을 대상으로 하는, 개념 없는 앎.

      अनुमानanumāna비량(比量)

      추론. 표지를 뒤따라 일어나는 앎.

      पक्षpakṣa종(宗)·유법(有法)

      논증의 주제, 또는 주제와 속성을 합친 주장.

      साध्यsādhya소립법(所立法)

      주제에 대해 증명되어야 할 속성.

      हेतु · लिङ्गhetu, liṅga인(因)

      주제에 있다고 알려진 이유·표지.

      दृष्टान्तdṛṣṭānta유(喩)

      결합 관계를 보여 주는 공유된 실례.

      व्याप्तिvyāpti편충(遍充)

      이유가 있는 곳엔 반드시 증명될 속성이 있는 불변의 결합.

      स्वलक्षणsvalakṣaṇa자상(自相)

      말로 담을 수 없는 찰나적 개별자. 지각의 대상.

      सामान्यलक्षणsāmānyalakṣaṇa공상(共相)

      개념이 가리키는 일반적 특징. 추론의 대상.

      ✦
      parīkṣā

      연습문제

      선택지를 누르면 곧바로 채점됩니다. 답을 고른 뒤 나타나는 해설을 펼쳐 선택지 하나하나의 근거를 확인해 보세요. 뒤로 갈수록 어려워지며, 마지막 문제는 법학적성시험(LEET) 언어이해 수준의 독해와 추론을 요구합니다.

      맞힌 문제 0 / 5
      १기초

      ‘프라마나(pramāṇa)’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२이해

      본문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은?

      ३적용

      다음 (가)~(마)를 니야야 학파의 오지작법 순서대로 바르게 배열한 것은?

      (가) 그러므로 이 언덕에는 불이 있다.

      (나) 이 언덕도 그와 같이 연기를 지니고 있다.

      (다) 이 언덕에는 불이 있다.

      (라) 연기가 있기 때문이다.

      (마) 연기가 있는 곳에는 어디든 불이 있다, 아궁이처럼.

      ४분석

      본문의 ‘인의 삼상’을 바탕으로 <보기>의 논증을 판정한 것으로 옳은 것만을 있는 대로 고른 것은? (단, 상주하는 것의 예로는 허공을, 무상한 것의 예로는 병을 든다.)

      A: 소리는 무상하다.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B: 소리는 상주한다.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C: 소리는 무상하다. 인식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ㄱ. A는 동품에 속하는 병이 눈에 보인다는 점에서 제2상을 충족한다고 하더라도, 제1상을 충족하지 못하므로 올바른 이유가 될 수 없다.

      ㄴ. C의 이유는 제2상과 제3상을 모두 충족하지 못하므로, 주장의 정반대를 증명하는 이유가 된다.

      ㄷ. B의 이유는 동품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이품에서만 발견되므로, 오히려 주장과 모순되는 속성을 증명하는 결과가 된다.

      ५최고난도 · LEET형

      [5]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인도의 인식론 전통에서 ‘프라마나’는 올바른 인식을 산출하는 수단을 뜻하지만, 수단과 그 결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학파마다 견해가 갈린다. 니야야 학파는 인식이라는 사건을 행위의 구조에 비추어 분석한다. 나무꾼이 도끼로 나무를 쪼갤 때 행위자와 도구, 대상, 결과가 구별되듯이, 인식에서도 인식 주체, 인식 수단, 인식 대상, 결과로서의 인식이 서로 구별된다. 이 가운데 인식 주체는 생겨났다 사라지는 개별 인식들과 달리 지속하는 자아이다. 니야야는 “눈으로 보았던 바로 그것을 지금 손으로 만진다.”와 같은 판단을 자아가 존재한다는 근거로 제시하는데, 서로 다른 경로로 생긴 두 인식을 하나의 대상에 대한 것으로 묶는 일은 두 인식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가지는 단일한 주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니야야에 따르면 동일한 대상이 여러 프라마나에 의해 거듭 인식될 수 있다. 멀리서 추론한 불을 가까이 가서 다시 보는 일은 그 전형이다.

      불교의 디그나가는 이러한 분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인식은 대상의 형상을 띤 채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며, 그 인식이 대상의 형상을 띠고 있다는 측면이 ‘수단’이라 불리고 그 인식이 자기 자신을 아는 측면이 ‘결과’라 불릴 뿐이다. 수단과 결과는 하나의 인식에 대한 두 가지 기술이므로, 이를 사용하는 별도의 행위자는 요청되지 않는다. 나아가 디그나가는 인식 대상을 두 종류로 한정한다. 지각은 말로 드러낼 수 없는 개별적 특징만을, 추론은 개념을 통해 파악되는 일반적 특징만을 대상으로 가진다. 따라서 추론한 불과 지각한 불은 엄밀히 말해 같은 대상이 아니며, 둘을 하나로 묶는 판단은 지각 이후에 일어나는 개념적 구성의 산물이다.

      디그나가의 후계자 다르마끼르띠는 프라마나를 ‘속이지 않는 인식’으로 정의하면서, 다른 곳에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대상을 밝히는 인식’이라는 기준을 덧붙인다. 이 기준에 따르면 이미 파악된 대상을 다시 파악하는 인식, 예컨대 기억은 프라마나가 아니다. 동일한 대상에 대한 복수의 프라마나를 인정하는 니야야는 이러한 새로움의 기준을 프라마나의 조건으로 삼지 않는다.

      윗글을 바탕으로 <보기>를 평가한 것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나그네 갑은 멀리 산등성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산에 불이 났다고 판단했다. 한 시간 뒤 산마루에 이른 갑은 타오르는 불길을 직접 보고서 “아까 내가 짐작했던 바로 그 불이로구나.”라고 말했다.